교황 레오 13세 성하께서 10월을 로사리오의 성월로 제정한 후로 우리는 매년 이달에 묵주의 기도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더 열심히 실천한다. 성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심기도 중에 이 기도만큼 보편성과 대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이 기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는 물론이며 학식이 많은 사람이나 순박한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드리는 것이다. 교회의 오랜 전통을 통해 모든 교우들의 신앙생활 속에 길이 뿌리박고 있던 이 기도가 제2차「바티깐」공의회를 전후하여 소홀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교회의 다른 모든 신심행사들과 함께 이 로사리오의 기도도 급변하는 상황에 영향 받아 과도기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이 기도가 이미 낡았거나 시대에 뒤떨어져 현대의 감각과 요구에 맞지 않는 것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도 높은 영성의 단계에 올라가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를 열심히바치고 있다. 서거한 교황 바오로 6세 성하의 마지막 고별식 때 그 손에 들려있던 묵주와、인도의 빈민굴에서 활동하는 데레사 수녀의 손에 들려 있는 묵주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아직도 이로사리오의 기도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신앙생활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는 기도중의 하나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러면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릴 때 때때로 막연한 느낌이거나、기계적인 읊음에 불과하게 느껴지거나 또는 너무나 성모중심의 기도로 생각되어져 결국은 이 기도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가?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거에는 기도를 드릴 때 그 뜻을 잘 알거나 모르거나에 상관없이、드리는 기도 자체가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며 그자체로서 공로가 쌓여진다고 생각했으나 현재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과거에는 교회의 가장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요 전례행사인 미사 중에도 묵주기도를 계속 바침으로써 미사의 신비적인 능력과 묵주기도의 신비적 능력이 서로 조화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전례정신에 의하면 모두가 전례의 뜻을 잘 알아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권장함으로써 뜻을 잘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드리는 기도는 별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로사리오의 기도에 담긴 깊은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연히 이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는 성모께 바치는 기도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을 성모를 통해 예수께 드리는 기도이다.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매일 드리는 성무일도는 구약의 시편 1백50장이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을 찬송하고 그의 영광을 기리는 이 성영을 일반신자들은 여러 가지 사정상 다 할 수 없었기에 1백50편의 성영을 대신해서 1백50번의 성모송을 읊음으로써 하느님을 찬송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성모송을 바치면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역사를 깊이 묵상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온 인류가 기뻐해야 할 구세주의 탄생을 천사가 예고해주는 것으로 시작되는 묵주의 기도는 구원사의 정점이 되는 십자가상 수난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과 전 인류 구원완성의 보증이 되는 성모의 하늘에 올림을 받는 신비로서 끝맺는 기쁨과 고통과 영광의 신비 즉 전 인류 구원사를 찬양하고 묵상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어디까지나 성모를 통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고 묵상하는 기도이지 성모께만 드리는 기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의 인류구원 신비에 대한 묵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기도를 단조롭다고 생각하고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이 기도의 본래의 뜻을 잘 모르고 성경에 있는 기쁨과고통과 영광의 신비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교리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로사리오의 기도도 나오고있다.
故바오로 6세 교황도 1969년 로사리오의 기도를 신자들이 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에도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새로운 로사리오의 기도」라는 작은 책자가 나와 있으며 여기에는 성경에 중점을 둔 새로운 방법이 몇 가지 제시되어있다.
이 기도에는 옛날부터 많은 은사가 부여되어 있으며 혼자서나 단체로나、묵주를 가지고서나 경우에 따라서는 묵주 없이 바쳐도 교회법상의 여러 가지 은사가 주어진다.
이제 우리는 이 기도자체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어떤 기도를 반복해서 바치고 이를 쉽게 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구슬이나 끈의 매듭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불교에도 염주가 있고、이슬람교에도 99번 알라神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이런 염주가 있다.
인간본성에 의하면 같은 기도를 계속 반복할 때에 그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심과 생각과 느낌을 더욱 다지게 되며 동시에 드러내게 된다. 또한 신앙심이나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에도 반복되는 기도를 통해서 정신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시킬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다는 현재와 같이 바쁜 시기에 한 단 만이라도 잠시앉아 기도한다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에 와서 이 기도가 더욱 필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성모송을 열 번씩이나 반복하는데에는 열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충족성과 원만성、또한 영적인 충일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뜻이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묵상에 성모송이 사용되어지는 이유는 초대 교회 때부터 은교회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와 하느님의 어머니인 성모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있는 성모의생활과 활동을 우리가 찬송함으로써 우리는 무한한 신뢰심과 사랑、또한 하느님의 모친인 마리아를 통해 인간의고귀함에 대해 확신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 번의 성모송을 바칠 때에 단조롭게 반복만해서는 안되며 동시에 그때그때마다의 신비에 대한 묵상이 주류를 이루어야 한다.
음악에 비교한다면 두 가지의 다른 선율이 서로교차하면서 조화되어 아름다운 소리를 내듯 성모송과 신비의 묵상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말로써 표현 되는 기도가 명사의 기도로、또 규정지어진 기도를 통해 더 깊은 은총과 신비의 기도로 들어 높여지고 들어 높여진 이 기도는 동시에 말과 기도문을 통해서 인간의 감각과 마음에 뿌리박히게 된다.
그러므로 로사리오 기도를 잘 바친다는 것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거기에서 자신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음을 뜻한다.
다른 한편 아무리 이 기도가 훌륭하다고 해도 이 기도가 신앙의 유일한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적인 교회의 전례적 기도가 항상 더 큰 중요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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