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그 길이 멀고 험악해서가 아니다.
불과 몇 시간이면 가닿을 지척이건만 그러나 갈 수 없는 북한땅….
그곳에 남겨둔 양떼들과 재회의 날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목자에게는 헛되이 흘러간 지난날이 한스럽기만 하다.
덕원면속구와 함흥ㆍ연길교구장 서리로 고향에서 쫓겨나 4반세기를 외롭게 살아온 이 디모레오몬시뇰(74세)이 금년 10월 11일 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았다.
『북한 신자들을 잊을 수 없다. 늘 마음 한구석이 비어있다. 교중미사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서두를 끝낸 이몬시뇰은 그곳 신자들이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신앙을 잘 보존하여 복원 앞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이몬시뇰은 1945년 러시아군이 북한에 들어온 후 성당과 교회건물들이 차례로 압수당하고 갖가지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박해받던 때가 가장 잊혀 지지 않는 일이라고 털어놨다.
자신도 스파이로 몰려 두 차례나 옥고를 치뤄야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상한 그는 48년 본국에 휴가차 떠난 것이 북한 신자들을 마지막 보게 될 줄은 정말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1월 다시 입국、그해 교황청으로부터 덕원、연길ㆍ함흥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는 이 몬시뇰은 남한에서의 자신의 주 임무는 북한출신 신학생들을 사제로 양성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52년부터 64년까지 왜관수도원 초대원장을 역임하고 그 후 서울 장충동 기숙사책임자로 있으면서 신학생양성에 주력해온 그는 74세란 고령에도 불구、현재 부산 명상의 집에 머물면서 교구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몬시뇰은 1905년 5월 12일 스위스 칸똔주「소로톨」음내「로르」에서 출생했다.
19 28년 수도서원을 한 그는 4년 후인 19 32년 3월 독일 읍띠비엔 대수도원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서품과 동시 그해 11월 처음으로 한국에 온 그는 40년까지 덕원신학교 사감 및 교수신부、그 후 48년 초까지 수도원본당、원산、고원、나남동 지서 사목활동을 폈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에 완전한 종교 자유가 허용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이 몬시뇰은 남한신자들이 고통 중에 있는 북한형제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줄 것을 요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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