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잠에서 깨어나 눈을 뜰 때 나는「내가 살아있구나, 나의 죽음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까?」이렇게 생각할 적이 있다.
그런때 나는 무릎을 끓고「주여,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은 아십니다.
지금 어디에선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과 평화의 위로를 주소서」하고 기도를 드린다.
그렇게 화살기도를 드리고 나면 내 마음이 평온해지고 가슴의 심한 고동이 멈추게 된다. 이기도문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외웠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지만 요즘도 여전히 그렇게 기도하며 산다. 이러한 나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놓고 나는 내가 노이로제 환자일지도 모른다고 몹시 부끄러워하며 가까운 가족에게도 그것을 감추고 살아 온지 오래였다. 그러나 내 나이 불흑의 마흔 고개를 넘기면서 사람이 평소에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정신병자로 취급받아야 할일도 또는 부끄러워 감추어야 할일도 아니라는 신념을 갖게되었다. 왜냐하면 죽음이야말로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어준 숙제가운데 가장 풀기 힘든 신비이므로 끊임없이 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웃마을에 계신 친정어머니 댁에 가면 안방 아랫목 화로안 뚯배기에 된장찌게가 보글보글 끓고 있을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믿듯이 죽음도 경험에 의하여 신빙되는 어떤 상황으로 인식 되는 것이라면 사람은 절대로 고독해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히 고독하고 괴로울 때 우리는 택시를 집어타듯 죽음을 거쳐 옆 마을에 살고계신 하느님을 뵈러 갈수도 있을 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죽음은 어느때 누구의 앞에서고 영원한 불가시의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교리도 결국은 죽음을 중심으로 설명될 때에 가장 잘 이해가 된다고 믿고 있다. 사람이 비록 원죄와 본죄로 더럽혀 지었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구원으로 인식하고 선택하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성혈로 우리의 죄악이 씻어져서 이 세상에서는 신앙 속에 사는 평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무한무궁의 하느님 속에 포용된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은 이를 통해 살아있는 나를 위하여 기도한다.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나보다 높은 성총지위에 있는 분으로 설정해놓고 세상에서 내가 바르게 살다가 바른 신앙 속에서 죽도록 도와달라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이들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가령 승하하신 교황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무엇을 할 수 있는가?「하느님, 돌아가신 교황님을 천국으로 모셔가 주세요」하고 기도할 것인가?
승하하신교황은 우리보다 더욱 가까이 하느님 안에 살고 계시므로 이세상의 평화와 질서와 행복을 위해 천주님게 빌어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생전의 인간교황은 바티깐 궁전에 거주하던 한 이국의 할아버지였지만 죽음을 통해 하느님 안에 포용된 교황은 바로 나의 집, 우리의 밥상머리, 우리의 발길이 머무는 어디에나 함께 거처하는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 주신다. 죽음이 시간과 공간의 벽을 말끔히 부셔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으로 나는 내 주위의 죽음들을 지켜본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평생토록 몸이 약하시었다. 이분이 늘 생각하던 것은『내가 과연 옛날의 순교자들처럼 칼날아래 목을 드리 밀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신앙이 약하여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시면서 항상 부끄러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평생동안 치르는 병고의 아픔을 옛날 순교자들의 고통을 묵상함으로써 극기하시는 방편이었음을 나는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항상 치명자의 고통을 묵상하여 전신을 더운 땀으로 적시면서 그들의 고통에 참예하신 나의 어머니는 입으로는 치명을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부끄러워 하셨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살아있는 매순간마다 무수한 치명을 경험하며 살아가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어머니는 평생을 방안에 누워서 앓기만 하시었지만 지금도 수도자가 순교자의 이미지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하느님이 운명으로서 사람들 각자에게 지워주신 持病을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신앙의 자세로 소중히 아끼면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 살아계시던 때 우리 두 모녀가 서로 만나기 위하여서는 많은 노자와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며 거리를 방황했어야하였다.
그러나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 그분은 다만 천국에 계신한분의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세상의 모든 것 ?하늘과 별과 달, 나무와 풀잎에 맺힌 이슬, 바다와 모래알 책같피 사이의 훈기, 그리고 고지위에 씌여지는 글자들….
요컨대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자연과 사물들로 자유로이 변신하면서 나와 더불어함께 계신다.
산사람은 이 세상 어디엔가 사방 너댓자의 공간속에 한정되어있어 만나러 가기위해 우리가 항상 거리에서 뛰어야하지만 공존하며 우주 안에 산재하여서 항상 마주보고 살게 된다. 죽음이야말로 이별이 아니라 영원한 결합임을 오늘 더 깊이 묵상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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