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태동안 나는 귀를 몹시 앓았다. 이비인후과를 여러 군데 찾아 다녔으나 의사들은 한결같이 이상이 없다고 진단하였다. 그러나 귀는 점점 더 아팠었다. 송곳이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관통하듯 그렇게 무서운 고통이 나를 공포로 떨게 하였다. 그런 고통의 순간이 올 때면 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신음 섞인 비명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참으로 묘한 일은 어떠한 신체적인 아픔도 끊임없이 지속되는 일이 없고, 고통과 고통의 사이사이에는 황홀한 쾌적이 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마치 出産時의 진통과도 같다. 그래서 잠시전의 그 죽고 싶으리만큼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유별스레 아름답게 느껴지는 인생사를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가는 동안 의사도 원인을 모르겠다던 내 귓병은 어느 사이엔가 서서히 사라져 버렸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옛말처럼 내 귓병이 그러했듯이 세상만사도 늘 기복과 흥망과 희비로 엇갈린다.
공경하는 어른께서 어제는 따뜻한 위로를 주시더니 오늘은 이유 없이 냉냉한 태도를 보이신다. 그러나 내일은 또 풀죽은 내 모습이 무색하게도 인자한 격려를 보여주실 것이다. 감정에도 起伏이 있고 愛憎에도 순환이 있는 때문이다.
세상만사가 다그러하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 맑은 날에 이어서 궂은 날이 올 줄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도 萬物은流轉하며 우리가 발목을 적시는 강물도 강은 같은 강으로 보이되 실제로 흐르는 물은 항상 다른 물이라고 말하였다. 정말 그렇다. 세월속의 人間事는 돌멩이가 굴러가듯 영어의 L字필기체 소문자가 이어지는 모습으로 계속 流轉한다. 그래서 우리들도 기쁨과 슬픔, 건강과 아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현명을 닦기도 하고 또 조금씩 늙어도 간다.
생각해보면 현명해진다는 것과 늙는다는 것은 상호비례의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슬픔과 고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修練된다.
그러면 조금씩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자신이 소유했던 것을 내어놓게도 되고 또 기쁘게 포기하게도 된다. 그래서 현명하게 늙는 사람은 삶의 과정이 언제나 평화롭다. 가령 궁극에 이르러 생명을 포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지속적 삶의 한 양상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죽는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가? 목숨을 내맡기는 그 순간 세상의 호적부에 씌어있던 우리의 이름자위에 검은 줄이 그어지고 우리의 육신이 땅속에 묻히는 그 일만이 죽음인가?
사람의 세포는 일정기간마다 완전히 묵은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생성된다.
또 사람의 적혈구는 1백20일만을 살고 죽으며 새로운 적혈구가 샘처럼 골수에서 솟아나고 또 연이어 비장으로 흘러들어가 죽는다. 그러니까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어제의 내 살과 피는 오늘의 내 살과 피가 아니고 죽음을 통해 변화되어있는 살과 피이다. 같은 것은 다만 내영혼일 뿐이다. 아니다. 영혼인들 어떻게 같겠는가? 우리의 영혼도 매일매시간 조금씩 성화되거나 아니면 조금씩 죄악으로 더럽혀진다. 성화하는 변화를 통하여 조금씩 죽어가거나 죄를 짓는 변화를 통하여 조금씩 죽어간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肉眼으로는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어제와 오늘이, 또 오늘과 내일이 항상 다르다. 잠시도 제자리에 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를 나는 작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애의 대단원을 내릴 때 우리는 작은 죽음들이 모여서 된 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피가 바뀌고 세포가 바뀌고 팽팽하던 얼굴에 잔주름이 늘고 또 흰머리의 수효가 늘어가듯 나도 나 자신이 퍽은 변해왔다고 생각한다. 부모님 슬하에서 호강하던 때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그 칼날같이 오만하던 성질을 다 어디다 버리고, 이제는 죽을 대로 죽어서 옛날의 아무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눈길이 땅으로만 가있는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나는 몇번이나 죽으면서 예까지 온 것일까.
변화하고 죽어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만약20세의 내 젊음을 지금까지 소유해야 했더라면 내 작은 가슴은 이미 불에 타서 산화해 버렸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른들이 지그까지 모두들 생존해 계신다면 그 단조로운 無變의 획일성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는지? 사람은 순간마다 죽어가고 있으며 궁극에 이르러 영혼과 육신이 갈라지는 참 죽음을 맞아야 한다. 죽음이란 찰라적인 생과 영원한 내세의 전환점이고 삶의 모든 갈등과 모순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人生죽음의 의미와 영원한 내세을 인식하고 신앙하는 수련기라 할 수 있다.
나는 계속 변화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내 성질을 한번 죽여서 이웃과의 정을 두텁게 할 수만 있다면 주님 앞에서 주님을 위하여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하며 작은 죽음과 작은 부활의 고리(環)를 정성껏 이러가고자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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