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으시는 분이시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한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인간을 유혹한 악마에게서 구원하실 뜻을 비추셨다. 그 후 죄중에서 방황하는 인류역사의 흐름 속에 줄기차게, 하느님의 구원의지 표명되어왔다.
드물게는 무서운 엄포로, 그러나 대부분은 어버이의 사랑으로 권유하고 애걸하며 당신께로 되돌아오기를 바라셨다. 특히 이스라엘백성을 택하셔서 구원의 약속을 맺으시고 그 약속을 되풀이 강조하시면서 한없는 인내와 사랑을 쏟으셨다. 마치 제멋대로 살아보겠노라고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인간 모두의 희개를 기다리셨다.
마침내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차마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어서 맨발로 뛰쳐나와 마중나가시기까지 하시는 것이었다. 또 다른말로 표현하면 길잃은 양이 제발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다른 많은 양들을 그대로 두고 잃은 양한마리를 찾아나서기까지 하시는 착한 목자로서의 하느님은, 과연 때가 차자 정말 위대한 사랑으로 인류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류의 역사가운데에 뛰어드신 것이다.
기다림에 지쳐서 찾아 나선 것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하느님이 애걸하다시피 빌면서 찾아오시기까지 하시는지. 참으로 아담의 죄는 복된 죄였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풍성하게 내렸던 것이다. 올바른 사람도 착한 사람도 아닌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치 인간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으시면 불행이나 할 것처럼 또는 하찮은 인간의 사랑을 받으면 더욱 행복해지시는 양『목마르다』하시며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 되셨다. 약속에 의해서 사람과 하느님사이에 기다림이 있었는데 결국은 하느님이 참지 못하시고 찾아오시게 된것이다. 주객의전도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뉘우침은 걷고 자비는 뛰었던 것이다.
하느님이 찾아오심으로써 과연 인류는 모두가 하느님을 영접했던가하면 그렇게 못하였다. 몇몇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 들였을뿐, 더구나 민중의지도자들은 십자가위에서 죽이기까지 했다.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그렇게까지 체신머리없이 거동하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 짓는 자들이 멋모르고 내어버린 돌이 그렇게도 중요한 모퉁이 돌일중이다…. 당신을 찾고 기다리며 함께 해주시기를 바라는 인류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자하시는 하느님은 오늘날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계신다. 하느님은 멀고 사람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당신은 성체성사 안에, 복음성경 안에, 또 흔하디흔한 보잘것없는 이웃사람 안에 계신다고 일러주신다.
햇빛을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도 숨 쉬는 공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너무나 가깝고도 풍요로운 하느님의 사랑 속에 살다보니 하느님을 새삼스럽게 찾을 필요가 없게 된다는 걸까? 아니다. 불신의 무서운 죄가 눈뜨고도 못보게 하는 것이다. 악을 일삼다보니 자기죄상이 드러 날까봐 고의로 빛을 미워하고 멀리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기다리다 못해 인간으로 찾아오셨고 그나마도 죄인들을 구원하기위해 죄인처럼 죄인들 가운데서 살아주시는 하느님마저 믿지 않고 멀리하다보니 이제는 사람들마저 서로가 멀어지는 세상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단절과 고독은 사람들을 점점 불신과 절망에로 몰아넣어 불행하게만 들고 있다.『내가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하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두렵기만 하다.
하느님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믿음이 사라지면「세상은 무범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따듯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은 당연할 것이다.
모든 여건이 이렇게 허망하게 되어가는 것 같은 세상에서도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라나고 있고 누룩처럼 부풀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교회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교회 안에 이미 함께 하고 계신다. 교회는 이상의 빛으로써 어두움을 밝히고 있다. 마치 기름까지 준비하고 있는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찾아오시는 신랑을 불을 밝혀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하느님이 이미 와계심을 만방에 일깨울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세상한 가운데에 계시는 주님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증인노릇을 해야 할 사명만이 남아있는 것 이다.
예수님은 오늘의 시간과 공간속에 깊숙이 와계시면서 각자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들어라 내가 문밖에 서서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주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함께 먹게 되겠다』(묵시3장20절)고 하시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며 회개하는 때에 양심도 회복되어 이렇듯이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복음의 말씀 안에 성체성사 안에 또 이웃 사람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육화(肉化강생)하여 계심을 믿는 것이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와 이웃사랑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힘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뵙도록 하는 것이 죄인들을 찾아나서시는 하느님을 도와드리는 교회의 상사적 구실이 되는 것이다. 『당신들이 지금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은 행복합니다』(루까10장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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