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되면 또 한 번 휩쓸고 지나갈 저금통장과 자선 행각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린 무엇을 우선적으로 염려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겠다. 궁핍과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동정하기에 앞서 그를 낳는 원인을 직시해야겠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겠고 그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겠다는 것이다.
1、회개의 길
「수천만 인간들이 인간답지 못한 생활조건 아래에서 실제 노예상태에 살고 있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만일 귀머거리가 아니라면、그들은 억눌린 자들의 외침을 들을 것이다. 그들 억눌린 자들의 외침、그것이 하느님의 소리다 비참한 미개발의 회색지대 덕으로 살아가는 부유한 지방에 사는 자들이、만일 아직도 들을 줄 안다면、그들은 힘없고 희망도 없는 침묵의 애절한 부르짖음을 들을 것이다. 힘없고 희망 없는 묵묵한 부르짖음、그것이 곧 하느님의 소리다.
부의 몹쓸 분배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은、그들이 아직도 약간의 양심이 있다면 가난한 이들의 말없는 혹은 사나운 저항을 깨달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와 자본주의、사회주의 제국과의 관계를 주의 깊게 볼 줄 아는 자는 오늘날 불의가 자행되는 것은 비록 개인과 개인、단체와 단체사이에서 만이 아니라、국가와 국가사이에서도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하느님께서도 근본적이고 사나운 복수를 하실 것이다」(Helder Camara 대주교)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는 수많은 악들이 고도성장 사회나 산업사회가 빚어내는 부산물이라고 돌릴 것인가 아니면 고도로 성장하는 물질주의적인 간 이기심이 빚어내는 독소인가를 생각해야겠다.
밤새도록 나와 이웃의 피를 빨아먹은 독충이 바로 나의 이기심이었다면 백명의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면서 한명의 가난한 자에게 쌀 산가마 주었다고 그것이 자선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검은손이 은행 창구를 드나들 때 우리의 한마디 약속이 헛되이 공중을 맴돌 때 우리의 심술과 미움이 선의의 인간 심장을 꿰뚫을 때 우리의 무관심과 회피가악의 은상을 덥혀줄 때 우리 모두는 무질서와 인간성 파괴의 공범자가 아니겠는가?
무질서와 악은 개인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지만、동시에 나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도 쉽다. 이러한 것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부각되는 듯하다.
내가 빚어낸 각종 공해들 연기와 악취 먼지와 소음 쓰레기와 폐수는 물론 거짓과 눈가림 나아가서는 유해독소와 약품 유해식품까지 버젓이 판을 치고 있지만 그것이 나와는 무관한 듯 생각하기 쉽다.
우리의 불의와 불충실 이기시모가 욕구충족은 물론 무관심과 게으름과 회피 등이 이런 모든 사회적 죄악의 공범자가 되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가?
오늘날의 회개는 우리들이 형제애를 실천하기위해 해야 할 많은 제도적인 협력과 투쟁에 있다고 본다.
본업화 전문화 조직화 비대화한 사회기구는 개인의 노력 만으로서는 어떤 형제적 사랑의 실천이 효율적으로 이행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강대한 권력 및 경제기구나 대량사회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깊이 현대를 파악한 해답을 그리스도교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 기인한 연대책임과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정신에 관한 메시지에서 제시하고 있고 또 현대영성(靈性)의 조류가 그러하다.
따라서 과학 및 산업사회의 혜택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또 현대문명이 치닫는 자멸의 길에서 구원받기 위해 우리의 회개는 집단적(공동체적)이어야겠고 이기심의 껍질에서 벗어나「오늘날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회개가 이루어져야겠다. 우리는 가난한자들의 거주와 노동과 식생활을 위협하는 모든 불의한 투기심(投機心)과 이기심에서 회개해야겠다.
병자와 고아와 노인 갇힌 자들을 찾아보고 위로하는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사회복지 의료혜택 범죄예방과 교육적 뒷받침 등을 제도화하는데 이바지 해야겠다. 우리는 각종 공해와 인간파괴의 원인인 거짓과 무지 무질서와 무분별에 대한 무관심과 회피에서 회개해야겠다. 우리는 권력과 금력에 의아 부근성과 그 만능사상에서 회개해야겠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인간답지 못한 모든 여건을 조장하는데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치는 모든 사회악의 원인임을 깨닫고 깊이 회개해야겠다.
이와 유사한 모든 제도적인 노력에 우리 모두가 능력껏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저질러온 모든 과오를 속죄해야 할 것이다. 허식적이며 주기적인 자선행위들은 스스로를 자선가 또는 박애자인 양 자족케 하여 실제 사회개선을 위한 노력에는 눈을 어둡게 할 수도 있으리라.
2、십자가의 길
시련과 유혹은 모든 인간이 겪어야할 생활의 한부분이다 아무도 시련과 고통 없는 세상을 꿈꿀 수는 없다.
사순절의 주제로 항상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시련과 유혹은 그분이 이러한 인간의 조건에 동참하심으로 인간이 겪는 시련과 고통과 유혹의 십자가의 길어 의미를 부여하신다.
사순절동안 교회가 특별히 희생과 보속 단식과 금육 등을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일상 생활에서 오는 시련과 유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쌓게 하며 그리스도의 길에 동행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 생활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회개의 때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과 시련은 어떻게 보면 인간스스로 짊어지는 경우가 많고 적어도 인간 공동체가 서로 짐을 지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남의 회개만을 생각하는 자들을 포함한 인간모두가 회개하기 전까지는 결코 세상의 악과 고통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선의의 인간과 무죄한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 초래되고 특히 무질서 한 인간、무책임한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결과라고 생각됀다.
물론 아무도 자기의 고통과 십자가를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인간은 남의 짐까지 서로 짊어지도록 공동운명을 지닌 존재이며 그렇게 서로 고통과 악을 나누지 않으면 아무도 존재치 못할 것이다.
또 원치 않아도 나눌 수밖에 없도록 조건 지워져 있다. 다만 그 시련과 악의 의미를 구원과 관련시켜 찾아내야하며、우리의 고통과 시련이 인류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겠다.
그리스도의 빠스카의 신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로는 우리는 반드시 이 죽음과 암흑의 시련을 겪어야 하며、그를 통해서만 부활과 영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하는 것이 아니야?」(루까 24장26절)
이 십자가와 고통의 길을 통해 우리는 빠스카 신비에 더욱 접근하게 되고 더욱 효과 있는 준비를 하게 된다.
3、신앙의 길
이 빠스카의 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게 제시하신 약속과 계약의 길이기도하다. 주님이 제시하신 그 길에 충실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은 신앙으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시련 속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리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전형적인 모범이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아무것도 거절치 말도록 우리는 초대되었다. 이러한 초대에의 전적인 응답은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을 깨닫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크나큰 사랑을 깨닫고 그에 응답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지、결코 우리의 공로와 선행에 의한 보상이 아니다.
현대는 많은「不在」가운데서 특히「신앙不在의 시대」라고 한말이 생각난다. 인간의 능력개발과 과학의 무진장한 발달이 신의 존재를 망각케 하고、「있어도 필요 없다.」는 反 信 풍조를 낳게 한다면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어쩌면 물질적 발달과 반비례한 정신적 저능아가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어디 신에 대한불신뿐이랴、인간에 대한 불신도 그에 못하지 않다. 개인적 신뢰감은 물론、공신력도 땅에 떨어지고、국제사회 역시 기회주의적 실리주의적 불신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어느 방송에서 젊은이의 대담 가운데「오늘날의 친구관계는 믿음보다 실리적 이해관계위에 형성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믿음」을 「생명」과 맞바꿀 사람은 어리석은 자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4、영광의 길
예수께서 받으신 영광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세적 영광과는 거리가 멀다. 그분의영광은 모든 것을 버리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지극한 순종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받게 된 영광이었다. 그분의 비상생활은 따라서 실패와 고통과 죽음으로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영광에로 향한 충만한 삶은 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과 같은 길 일수 밖에 없다. 이러한 영광의 길을 사도 바오로께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읍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필립3장8-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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