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조(벽)는 경주 이씨로 본시 고려 때부터 대대로 벼슬을 하여 내려오는 유명한 집안이요 또 무관으로도 유명한 개국공신이었다. 이덕조(德祖)는 어려서부터 재주와 총명이 탁월하였으나 고집이 세어 벽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차차 성장하면서 신체가 장대할 뿐 아니라 키가 8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로 역력사(力士) 의 타입에 지혜와 구변이 민첩하여 그를 능가할 선비가 없었다. 모든이가 그의 말한마디면 다 탄복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이 베드로(승훈)가 동지사를 따라 북경가기 7년전(1777~1783) 정종 정유(正宗 正酉)년에 당대 정상급 실학파들 즉 권철신ㆍ권일신ㆍ정약용 등 여러 학자들을 규합하여 고요한 절을 찾아 근 10여일간 동정석하며 그 어떤 심오한 인생철학을 탐구하기로 결의하고 우연히 입수된 예수회 신부 마태오 릿치가 저술한「천주실의」와「7극(七克)」책을 들고 해독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덕조는 영특한 빛을 얻어 만물의 시작과 끝. 천지만물의 창조주 한분이 계심과 우리인간의 시종. 그리고 상선 벌악의 철칙이 있음과 창조주의 계명이 있음을 자각하였다. 유불선교에서 찾지못한 신비스런 교의를 그 책에서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세밀한 서책이 없었으므로 더 심각한 탐구에 애로가 일어났다. 아는 대로 유일무이한 하느님을 공경하는 뜻으로 매일 조석으로 땅에 부복하여 기도를 드리고 들은 대로 매주 7일은 주일로 지키는 것을 규계삼아 매 7일ㆍ14일ㆍ28일을 맞으면 일만가지 세속사를 파하고 금유재를 지키고 묵상공부에 전념하기를 7년을 계속하였다고 다산 정약용은 자기 시문집(詩文集)에서 밝혔다.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흡한 도리를 더 세밀히 알고자 북경으로 들어가서 친히 배우고 많은 교회서적을 얻어올 생각을 하던 중 몇 해가 무료히 흘러갔다. 북경에 가는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일루의 희망을 잃지 않고 더 좋은 기회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쉬지 않고 아는 모든 도리를 그 나름대로 실학파 학자들에게 강의하여왔다.
1783년 제묘년 4월 15일 이벽이 마재 정약용의 집에 체류하다가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과 함께 서울로 배를 타고 올라갈 때(註ㆍ현 팔당댐 위에서부터 서빙고까지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다녔음) 다른 것은 서로 언급조차 아니하고 오로지 「천주실의」에 실린 교리 토론을 하며 내려왔다 이 세학자의 토론내용은 삼위일체ㆍ천지창조ㆍ영혼의 불사불멸ㆍ죽은 후의 상선 벌악 등이었다. 같은 배를 타고오던 다른 이들은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기다가 그 내용을 알고 나서는 오히려 신기하게 여겼다.
「궁하면 통한다.」는 옛 격언이 이루어졌다. 제묘년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세번째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가게 됐다.
이벽과 이승훈은 자별한 친구사이로 나이도 27세의 동갑이었다. 이벽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곧 이승훈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우리가 진실한 종교를 찾도록 천주께서 꼭 섭리해 줄 것을 의심치 않으니 이번에 그대가 「북경」에 가는 것은 우리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오는 천재일우의 좋은 획기적 기회가 될 것이니 자네 춘부장을 따라 꼭 북경에를 가게! 성패는 그대 성의에 달렸네. 이도(道)는 참 성인을 만들고 만물을 창조하신 참된 주를 공경하는 법과 서양선비(신부ㆍ주교)에게 모든「도」의 끝을 밝히 배워가지고 올 좋은 기회이네. 꼭 일심 정력을 들여 내말대로 실천해 주기를 자삼 부탁하네.
이「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네. 이「도」가 없으면 우리 마음과 성품이 다 살펴지지 못하고 만물의 이치를 알지도 못하고 임금과 백성이서로 할 바 도리도 알지 못 하며 아무 범적을 알 길이 없네 또 천지가 시작한 일이라든지 일월성인이 제 궤도를 일초의 격차 없이 운행하는 이치와 천신과악마의 분별과 인간의 시종과 결함과 죽음. 그 후 상과 벌을 받아야하는 끝을 알 길이 없는 것이네. 천주의 아들이 우리 죄를 구속하기 위해 강생하신 도리. 천당지옥의 존재 등을 알 길이 없네 꼭 이「교」를 알고 배워와야 하네 이것은 꼭 북경에 가야만 간단히 성취되는 것이네』이렇게 이벽은 이승훈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환영빙석하게 알아듣고 이 대사를 꼭 성사시키겠다고 다짐 했다. 이윽고 이승훈은 1783년 이벽이 모든 여비를 주선해주어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도달하여 곧 알렉산델 고베아 주교께 나아가 교훈을 듣고(註ㆍ이승훈이 이 주교를 만난 것이 아니라 양동재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웠음. 주교는 1784년 7월5일 마카오에 왔고 1785년 1월에야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이승훈이 주교를 만날 수 없었음) 여러 서적을 탐독함으로 깨달은 바 있어 곧 연구하고 교리를 익혀 베드로로 영세하니 조선에서 그리스도의 첫 제자가 되었다. 그때 나이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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