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어차피 부활했어야했다. 그 많은 수난과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오로지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강생하셨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사는 죄 많은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고자 심지어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그 분께도 유혹은 있었다. 천하의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릴 수도 있었고 고통의 쓰라림에서 헤어나고 자신의 안락을 위해 악에 굴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아픔과 고통의 죽음. 모독과 경멸의 죽음. 고독과 어리석음의 죽음인 십자가의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단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던들 그의 생애의 모든 선행과 기적은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 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활했다. 그자신의 신임 때문도 명예도 아니오 몇몇 사도들이 실망을 위로하기 위한 것만도 아니다. 부활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얻은 천주 성부의 응답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차피 부활했어야 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죄와 죽음에서의 승리는 이미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시며 성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마치죄인「처럼」죄를 지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행세했기 때문에 그의 희생은 속속들이 성부께 의합한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부는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시고 힘 있는 자가 되게 하셨다. 우리와 같이 신체 성을 가진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영광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신체 성을 가진 우리역시 언젠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신체성과 더불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고통과 수난 속에서도 우리와 같았고 영광 안에서도 우리와 같기를 원하셨기에 부활하고 성령을 파견하셨다. 성령과 파견은 그리스도가 부활했기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업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부는 성자의 희생 제물의 대가로 능력을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고 즉 성자를 우리와 같은 죄인의 형태로까지 만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성자가 피를 흘리는 고통과 수난을 당하게 했던 성부는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가지도 감수하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 그리스도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며 지불하려고 하는가. 성자의 충실한 구원 대가로 지불하는 불충의 생활. 지리에 대한 위선적인 생활은 그리스도를 또 한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지나 않은지. 세상에 배은망덕이 있다면 이보다 더한 배은망덕이 있겠는가. 어리석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억눌리고 압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에 보답하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피의대가로 구원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을 또 한번 짓누르는 죄악을 현대인은 또다시 범하고 있다. 내가 내형제에게 또 한번 잘못할 권리가 있는가? 없다면 왜 생활의 무질서ㆍ윤리적 타락생활ㆍ가난한 이의 누더기까지 벗기는 악랄한 착취를 자행하는가.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기에 비굴해지고 비참해진 그들에게 과연 나는 무엇을 했는가 현대인들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송두리 채 바치고도 모자라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자원했는데. 바로 너와 나를 위해 바로 당신이 생각하는 비굴하고 비참해진 그를 위하고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그대 자신의 용서받을 수없는 죄악을 용서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서 살라고 했는데 그대는 지금 또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가.
그대는 또 어떤 악을 저지르려고 계획하고 있는가. 아니 아직 자행하고 있는 죄악을 그칠려고도 하지 않고 새로운 악의 씨앗을 준비하고 있는가.
부활의 환희는 다만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생활을 개선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 피가 지금 그 생활을 개선하지 않고 마음의 회개가 없다면 영원히 멸망의 길로 굴러가리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세상에서 말하는 인생의 실패일지도 모른다.
죽기까지 순명한 정성의 보답이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현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는 확실히 패배자이고 구원받지 못할 어리석음을 자행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자의 죽음은 인류를 구속했고 죄와 죽음에서 해방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우리의 희망이요. 환희다. 그러나 그대는 변명할 것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범했느냐』고. 『내 힘으로 내가 벌어서 내가 즐기는데 내 이웃에게 무슨 몹쓸 짓을 했는가』하고. 그러나 네가 가지고 있는 부(富)는 하느님이 네 이웃과 같이 나누어 가지라는 것을 너는 왜 깨닫지 못하는가. 그리고 누가 네게 그런 부를 갖도록 도와주었는가. 또 네가 지금 즐기는 그 시간에도 네 富를 위해 그 비참한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부엌에서 공장에서 창고에서 밤을 새우는지를 왜 모르는가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부활의 환희만 알았지. 수난의 고통을 모르는 눈뜬 소경이 아니냐.
현대인에게 부활이 주는 뜻은 참 삶의 길이다. 그것은 환희와 해방을 맛보기전에 회개와 극복의 시련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희망이요 즐거움이다. 패배로 보였던 죽음이 영광을 가져다주는 참뜻은 .우리도 언젠가는 길고 어두운 밤을 참고 지새우면 밝은 새날이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오늘의 위선적인 환경에서 극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누어 받을 준비요 오늘의 압박과 궁핍을 이겨내는 슬기는 헛된 것을 버리고 값진 진주를 장만하는 복음적 슬기다. 너희는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라. 핍박과 가난에서 성부를 섬긴 대가로 영원한 복락의 나라 하늘나라에 들것이라. 했다.
어렵지만 견디어내자. 오늘의 고통은 내일의 편함이요 오늘의 슬픔은 내일의 즐거움이 되리라. 『내 이름 때문에 터무니없는 고통을 당하고 나 때문에 손가락질 받고 경멸 시 되면 너희는 복되리라. 하늘에 큰상이 너희를 위해 준비 되었느니라』하고 스승 예수가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믿고 기다리며 살자.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자나 압박받는 자나 자기의 처지에서 하느님의 의(義)를 추구하며 살아야한다. 어둡고 답답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시키는 사람이나 다 같이 사랑을 나누어야 된다.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을 대접하며 갇히고 병든 이를 위로하고 헐벗은 나그네에게 용기를 주고 입을 것을 주며 같이 부활의 영광을 나누어 갖도록 성실하고 열심히 살자. 이것이 오늘날에 부활이주는 참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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