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권에 살고 있는 한 가톨릭 詩人이 복음서를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神秘를 명상했다. 묵상집이라는 類型은 靈性神學의 범주에 자연히 묶여있게 마련이다. 그러나「나자렛 예수」라는 구상 詩人의 책은 그가 詩人이기 때문에 일반 信心書와는 아주 다르다. 하지만 그는 신앙인이기도 하다. 그는 詩人으로 이렇게 나자렛 예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수는 나자렛이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成人이 되기까지 초야에 묻혀 살다가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민중을 敎導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釘死 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 聖父 오른편에 좌정하신분이다. 하여 그에게 나자렛의 예수는 그리스도즉 이스라엘과 전 인류가 학수고대하던「구세주」(메시아)이다. 서문을 써주신 김 추기경은 그의 묵상집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이제 여기 한 詩人이 복음서를 충실히 따라가면서 예수와의 참다운 상봉을 시도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神學者 聖書學者가 적지 않지만 누구도 예수에 대해서 할 말을 다한 사실은 없고 그 모습 그대로 그려낸 사람이 없듯이 이 詩人 외 예수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이 내적으로 체험한 예수로서 때문에 그의 주관적인 생각이 없을 수 없다』(7面) 사실이다 그 어느 史家도 신학자도 화가 도시인과 음악가도 나자렛 예수의 神秘를 깡그리 파악한 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임마누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절대 미래인「神의領域」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리라. 신학자는 보통으로 예수의 理論과 實踐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啓示의 핵심)를 끊임없이 시대의 징표에 따라 밝히는 것을 業으로삼고있다.
그리하여 신학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동시대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산 言語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왕국、율법과 계율에 대해서 예수가 취한 태도、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병자의 치유와 驅魔등과도 같은 예수의 실천、즉 그의 카리스마의 諸면모등을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따라서 神學은 예수의 실천과 이론을 선포하는「第二의 말씀」인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이론과 실천을 하나의 모습(Gestalt)으로 마치 화가나 조각가가 이미지나 像을 통해서 對相을 造形하듯이 美的感覺을 동원하여 예수를 스케치하기도 한다. 예수의 모습은 審美的 權位를 띠고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行動 (追從)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H. Urs von Balthasar) 이때 造形藝術家는 神學者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音樂家들이 선율과 리듬의 言語를 나자렛 예수의 신비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실상 그리스도교는 기도의 계절을 따라 부른 그 숱한 미사곡과 노래들의 작곡을 끊임없이 후원하여 宗敎音樂의 영역을 구축하기도 했던 것이다.
신학자ㆍ예술가ㆍ음악가들이 예수의 일생을 명상했었다면 詩人이 예수의 생애를 복음따라 묵상한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일진대 가톨릭 詩人으로서의 그의 나자렛 예수는 晩時之歎과 함께 크게 환영할 일이다. 詩文學에 대해서 실로 문외한인 필자는 어렴풋하게 나마 늘 이렇게 생각해왔다. 詩가 리듬과 形式을 갖춘 예술이 되기 위해 詩人은 創作의 産苦(Poiesis)를 치룬 후 太古의 言語(Urworte)에서 싱싱하고도 기억에 남을 노래들을 퍼내는 사람이라고. 詩人은 太古의 言語에서 마치고 샘물을 퍼내듯이 노래 즉 말씀들을 퍼낸다면 그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시던「말씀」(Logosㆍ요노래 한1ㆍ1)에게서 靈感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나는 이런 이유에서(太古의言語)들 위에 군림하는 가장 탁월 한「로고스」가 人間이 되었을 때 그가 詩人다운 모습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 나자렛의 예수는 2천년이 가깝도록 그토록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靈感의샘솟는「源泉」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 끌 수 없는 신비요 쇠진하지 않는「인스피레이션」의 심연이기에 과연 그의 사건은 인류역사의 중심이다.
하여 그가 차라리 詩人이었다고 단언한다면 예수의 모습을 지나치게 詩的 인스피레이션의 영역으로만 국한시켜 스케치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필자는「구약시편의 비판적 입문」을 소개하면서 그 책의 副題로서「시편은 詩人예수그리스도의 노래」라는 이름을 덧붙인 적이 있다. 이는 세계문학사상에서 가장 오래 된 이스라엘의 시편노래들을 예수가 즐겨 불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조상들의 종교적 얼이 가득담긴 이 노래들을 자신의 내적인 心像을 표현하는데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께서는 詩篇으로 기도를 바쳤다. 그의 先驅者이던 세례자 요한의 탄생조차도「예언자적 詩篇장르」에 속하던「즈가리야의 노래」로서 불리우게 되어있었다.(루가1ㆍ68~79) 예수가 잉태되자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이스라엘」의 시 편집 부터의 찬양의 장르를 그대로 답습한「聖母의 노래」(Magnificat)를 부르셨다. (루가1ㆍ46~55) 이처럼 사람들은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의 신비를「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아마도 예수는 어린 시절 부터 그 부모가 가르친 대로 다윗이 예루살렘과 성천을 두고 읊은「시온의 노래들」(시편46ㆍ48ㆍ76ㆍ87ㆍ132)을 즐겨 불렀으리라. 그가 다윗의 후손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