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은 자신의 묵상집에서「프랑코 제피렐리의 영화 나자렛 예수」의 화보들을 적절한 자리에 효과있게 배치했다고 본다. 인상적인 그 화보들은 예수의 생애의 한 모습 한 모습들을 되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서구절들이 적절하게 인용되었으며 그사이마다에 具常 詩人의 예리하고도 정곡을 찌르는 詩作메모들과 宗敎心이 엿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詩人이아닌 일개 司祭로서 詩人을 부르고 그에게 호소하는 立場을 취하고싶다. 복음을 따른 그의 詩作메모들이 散文으로서가 아니라「太古의 言語들」(Urworte)에서 펑펑 쏟아지는 詩語로 예수의 신비를 노래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예수가 詩人이었다는 긴말을 한 것은 이런 뜻에서였다.
가령 예를 들면 예수회 司祭였고、科學者및 宗敎思想家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베들레헴 탄생>을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어머니의 품안에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出生의 큰 원칙에 따라 예수여
당신은 내 어린 영혼 안에
발을 디디셨나이다
보십시요
당신은 敎會를 통한성장과 進化를
내 안에서도 계속하시나이다.
그리고 보십시요
사람이 되어 팔레스티나에 오신 당신은
점차로 온 세상 구석구서까지
마치 무수히 많은「무지개 꽃」처럼 피어 번지나이다.
당신의 그 큰 신 現存은
아무것도 파괴하는 일없이 내주위에 있는 모-든 現存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나이다.
生命을 풍성히 주기위하여 누더기 강보에 싸인
당신의 그 가난한 現存과 겸손으로
우리를 풍부케 하소서
떼이야르는 詩人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神秘家였기에 다소 詩人다운 소질을 타고난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이 기도는 하나의<詩篇>과도 같이 降生의 神秘를 인상 깊게 요약해서 노래하고 있다.
다소 그가 즐겨쓰던 用語、가령 出生의 大原則、成長과 進化、現存등은 다분히 관념적 이긴 하지만 예수의 肉化는 어린 떼이야르의 영혼과 그가 살고 있는 敎會에 풍성한 神的生命을 주기위해 자신을<비운>神의겸손 (필립2ㆍ6-11)으로 적절히 처리되어 있다.
필자가 떼이야르를 들어 구상 시인에게 복음의 신비를 노래로 불러줄 것을 요구한 것은 진정 주제 넘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칼 라너가 지적했듯이 사제는 詩人에게 호소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쓴 것이다. 라너는 司祭와 詩人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제는 시인에게 호소할 뿐 아니라 詩人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은 사제가 자기 자신을 宣布하는것은 아니요 순전히 人間的言語로 人間의 眞理만을 說敎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神ㆍ人>인 예수 그리스도를<하느님의 말>로 말해야 한다. 사제는 자기의 마음속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창으로 꿰뚫렸던<아들의 마음>이 비추는 길을 신앙인들에게 가리켜야한다. 그가「여기 사람이 있다」(Ecce Homo!) 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人間性이나 그條件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가리키는 손은 인간이 누구이고 무엇 인지를 뚜렷이 제시할 수 있는 나자렛의 예수를 향해있다. 사제는 太初에 삼라만상과 인간을 창조한「로고스」를 지적함으로써「太古의 언어들」에서 言語를 퍼내어 그 로고스를 두고「여기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그가 이런 태고의 언어로 로고스를 말함으로써 자신이 울리는 꽹가리나 징(1고린13、1~13참조)이 되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제는 神의 빛、즉 하느님의 現存이 人間들의 마음의 제단 위에 내려오시도록 하는 使命을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빛은 人間마음의 기름으로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며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生命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요한1、3~5) 하지만 하느님이 보내신 말씀이 아무리 최상의 진리를 말하고 만물이 그 말씀을 통해서 생겨났을지라도 그 말씀은 인간의 마음 안 가장 깊숙이 와 닿아야 한다. 왜냐하면 로고스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참조한 막강한 에네르기이므로 인간의 언어로 인간에게 접근해 오지 않으면 사람은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人間에게 말을 건너는<말씀>인 이상 로고스는<인간적이고도 詩的 인말> (ein men schlich cichterisches Wort)을 빌어 人間과 對話하고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이유로 사제는 詩人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詩人의 도움을 얻은 사제는 그가 쓰는 太古의 言語에서 하느님의 로고스를 위해 봉헌된 도구 (言語)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사제는 알아들을 수 있고 유효하며 창조하는 로고스가 人間의 마음안에 강림하도록 촉매작용을 서둘고 있다. (이상55ㆍ10-11참조) 그래서 그는 詩文學의 <神學的 能力>을 詩人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詩人은 도한 사제를 부르고 있다. 사제는 詩人의辯을 듣고 싶어 한다. 끝으로 具常시인의「나자렛 예수」가 많은 독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게 해주고、<예수의 일>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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