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말엽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진 박해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그 뿌리가 흔들림 없이 줄기차게 교세를 확장해왔다.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창설된 한국교회의 모습답게 초기교회의 선열들은 죽음과 신앙을 맞바꾸는 극한상황 속에서 신앙을 사수하기위해 그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이러한 순교 선열 가운데 이국땅 유배지에서 외롭게 숨져간 동정녀 오다 줄리아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을 간직하기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서슴없이 택했던 신앙과 정절의 화신이었다.
1972년 10월 21일 한줌의 묘토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이 많았던 생애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불같은 신앙으로 그 생애를 사랑이 충만된 생애로 승화시켰던 한국의 여인 오다 줄리아의 묘토 일부가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3세의 어린나이로 일본 땅으로 끌려 간지 3백80년 만에 환국한 오다 줄리아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와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며 피를 뿌렷던 고국의 순교성지 절두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됐었다. 그로부터 10여 년、한국과 일본에서는「오다 줄리아 頭彰會」를 통해 줄리아의 성덕을 기리는 한편 그녀가 남긴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씨앗을 키우고 가꾸는데 열과성을 쏟아왔다. 오다 줄리아. 그녀는 분명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살기위해 모진 고난도 험난한 가시밭길도 기쁘게 걸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한 용감한 신앙인이었다.
『세상부귀에 마음을 빼앗겨 양심을 굽히고 하느님의 은총을 버릴 수 없다』는 피맺힌 절규로 끝내 배교를 거절、유배의 길을 택했던 오다 줄리아는 임진왜란 당시 불과3살의 나이로 5만여 명의 포로와 함께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녀를 데리고 간 고니시 유끼나까(小西行長) 밑에서 줄리아는 가톨릭에 입교 신앙의 눈을 떴고 뛰어난 미모와 함께 덕성이 높은 여인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의탁 완덕을 향해 끊임없이 크리스찬의 삶을 갈망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러나 와중지세에 있던 일본의 상황이 급격히 변경되면서 줄리아는 세력을 잡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시녀로 넘겨짐으로써 평온했던 신앙생활은 위기와 시련의 시기로 변모되고 말았다. 크리스찬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가시덤불속의 장미꽃처럼』 자신을 지키려는 지조와 더불어 영혼을 해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버릴 굳은 결의를 가지고 있었던 줄리아는 (로마 예수회 기록소에 있는 1605년 예수회 연보에 게재) 도꾸가와의 명에 의해 1612년 4월 20일 오오시마(大島)로 유배됐다. 오오시마에서 니이시마(新島)를 거쳐 다시 이즈열도의 최남단 고오쓰시마(新津島) 로 유배의 행로를 거치는 동안 줄리아는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신앙인의 힘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유배지 고오쓰시마(新津島) 는 東京남쪽 1백70여km에 위치한 절해고도로 7~8세대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비참하고 외로운 섬이었다.
이 바위섬을 갈보리산으로 생각했던 줄리아는 그 후 40여년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한국재래의 농사술과 생활의 이기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희생과 봉사로 생애를 보냈다.
줄리아는 1867년 7월 한국인 순교자 9명을 포함한 2백5위 일본순교 복자의 한사람으로 시복돼 영광돼 순교자의 대열에 올랐다. 티 없는 신앙과 이웃을 위한 봉사로 아낌없이 생애를 마친 오다 줄리아는 선종 후 4세기에 걸쳐 新津島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아오고 있다.
오다 줄리아에 관한 기록은 그랏세의「일본西敎史」 가운데『德川幕府에 가톨릭을 믿는 줄리아라는 한국 출신의 여성이 있어 德川家康의 준엄한 탄압에도 불구 자신의 신앙을 사수했다』는 기사가 비교적 자세히 소개돼있다.
또한 선교사 레온 파제스의「일본切支丹宗門史」등 문헌에 충실한 자료들의 소개가 계속됨으로써 줄리아는 일본의 신심 깊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숭배되어왔다. 줄리아에 관한 기록이 거듭 밝혀짐에 따라 교회사연구자들에게 이 특이한 인물에 대한 관심은 높아갔고 예수회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등 당시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던 수도회의 古文書가 정리 출판될 때마다 줄리아 연구에 대한 학적비중이 더해왔다.
이와 더불어 神津島인들은 줄리아의 위덕을 섬의 자랑으로 삼고자 도민전체가 총동원되어「줄리아祭」를 개최해오던 중 지난 70년 5월「東京 七島신문사」「가톨릭신문사」등의 후원과 東京대교구의 협력으로「오다 줄리아 頭彰會」가 조직됐다.
72년 오다 줄리아가 한줌의 묘토로 4세기만에 고국의 땅에 안장된 것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박희봉 신부를 중심으로「줄리아 頭彰會」를 조직、매년 일본과 한국에서 줄리아의 신앙과 성덕을 기리는 행사를 마련、오늘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현세의 가시밭길이 줄리아에게는 오히려 영원한 행복을 위한 사랑의길』임은유배지로 출발에 앞서 당시 일본 가톨릭 교회長이던 프랑소와 파시 신부에게 띄운 오다 줄리아의 친필 서신 속에 그대로 반영、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제가 지금껏 하느님을 위한 것이 부족한데도 사랑의 은혜를 입어 추방의 刑을 받게 되어 감격에 넘칠 뿐입니다. 천하의 재보를 모아 즐거움을 얻는다 해도 결코 이 은혜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여하한 대 환난에 마주칠망정 이를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기쁨으로 감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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