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무슨 논단의 논설이라기보다는 근래 필자가 생각하던것을 글로 표현한「傳敎有感」정도의 글이다. 먼저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전교관이 어떤 것인가를 제2차「바티깐」 공의회 정신에 따라 발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전교실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교회의 선교활동에 과한 교령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를 그 사명으로 한다는 점을 명시한다. 그것은 성부의 영원하신 인류구원意志에서 비곳되며 그것은 또 당신 아들을 인간의 역사안에 파견하심으로써 실천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완성되고 성신의 파견으로 세계종말까지、또 땅극변까지 결실되어 가는 것 이란 점을 명시한다.(2ㆍ5)
그러므로 교령은 「교회로부터 파견된 전파자들이 온 세계에가서 복음전파의 임무회를 심는 임부를 수행하며 믿지않는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독특한 일을 선교(Missiones)라교 한다」(6)고 언명한다.
이젠 우리는 이런교회의 선교가 이땅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오늘 어떤문제점을 안교있는지를 제한된 범위내에서 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Ⅱ、「주께서 한번 설교하신 것、혹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가 행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루까24ㆍ47) 땅극변까지 (사도1ㆍ8) 선포되어야한다. 이와같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한번 성취된것은 시대의 경과중에 만민에게 그 성과가 성취되어 가야한다」(선교교렁3)는 말씀은 지구의 東쪽 극변 나라에 기묘하게 실현된다.
그것은 바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시점이었다. 그거니까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더 정확히 말한다면 1784년에 한젊은 학자가 이국땅을 찾아가 영세를 받고 돌아온 사건은 다른나라의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볼 수 없는 특이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사건은 사건배후에 더 깊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사건이 종교적 사건만으로서가 아니라 당시의 이 나라 젊은 知性의 진면모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유하고 페쇄된 정신풍토에서 젊은 知性들은 眞理와 道를찾아서 참신하고 가없이 넓은 세계고 뻗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 몸부림은 빛과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과 접촉된다. 즉 하느님께서 그들의 지성의 패동을 당신의 은혜로 승화시켜 자연의 진리를 넘어 초자연의 진리를 만나게 하신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신천지로 향하던 여린싹들은 난폭한 無知의 暴力앞에서 좌절된다. 즉 모처럼 찾아온 眞理는 박해의 피고 얼툭진다. 百餘年이란 긴세월을 두고 幾萬名이라는 무고한사람들의 피가 이땅 방방곡곡에 뿌려졌다.그 토양에 새싹이 솟아나 이제 이 땅의 가톨릭신자는 1백20만 명에 달하였으니 이국땅을 찾아 이룬 한사람 한사람의 자원영세가 오늘 날 이렁게 풍한 결실로 나타났다.
하기야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고 귀국한후 그 주변 인물들이 속속 밀입국했을때는 벌써 신도수가 4천은 헤아렸다니 당시 평신도들의 활동은 가히 경탄할밖에 없는것이다. 그것도 流血이 낭자한 박해중에서이니 말이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하고 오늘의 한국 천주교의 교세를 잠깐훑어보면 今昔之感이있다.1978년말 현재 신도수약 1백 20만、사제수(한국)약8백50、수사1백70、수녀약2천9백、대신학생 약4백50을 헤아린다. 여타 교회의 교육사업 사회사업등도 괄복할 현상들이다. (CㆍCㆍK1978년말 통계) 어린 교회가 박해라는 무자비한 폭력을 견디어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善男善女들의 피와 땀이 흘려졌는지 상상조차 하기어렵다.
그러는 동안 한국사회도 많이 변했으며 많이 성장하였다. 이제 우리는 전진적 자세에서 한국사회의 전교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한다.
교회의 전교앙상과 활동은 그시대의 사회구조에 적응해 가야한다. 농경사회시대만 오늘과 같이 농촌인구가 격감하고 인구의 절대다수가 도시나 산업지대에서 살고 있는시대에는 농어촌전교방식은 오랜 전통속에 정립된것이니 더 말하지않더라도 도시와 산업지대 생활에 적응하는 새로운 전교수단의 개발과 활용이 절대로 요청된다.이것은 어떤 특정의 나라나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현대적 사회구조를 갖는 모든 지대에 해당된다. 그러나 필자가 과분한 탓이겠지만 한국가톨릭교회는 이런문제에 있어서 아직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것 같다. 현실의 변화에 제촉되어 우선 행동으로 나타나고 연구와 경홈의 뒷받침이 따르지 못하는것으로 보인다. 60년대 후반기에 촉발된 한국천주교의 사회에 대한 관심도는 70년대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었다. 교회와 사회사이에 전에 없던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였으며 교회의 사회활동은 일반사회의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인류역사가 새로운 장을열때 보통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그리 신기한것은 아니지만 昨今의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시사해준다.그것은 이땅의 교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기 위해 심한 진통기를 겪고있는것으로 보아 무방할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획일적인 견해와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다양한 현대세계에 있어서 꼭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근본적 이유는 인식의 차이라고 보아야겠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新과 舊、 進과 守舊、權力과 金力에 대한 親과 批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교회外的요인들의 교회理解에도 문제가 있다. 그 들이 주장하는 교회관은 각끔 별써 지나가버린 묵은것들이다. 불론 교회나 교리자체에 본질적 변화가 있을리는 없겠지만 변천하는 사회속에서 교회는 자기를 설명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큰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전진하는 교회의 모습을 바로보는 慧眼이 갖추어지지 않는한 守舊的 사회와 교회의 전진하는흐름사이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전진하는 교회상의 변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역시 국위자들에게서보다는 제1차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교회내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지도층 고위층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공산 주의를 저지하고 배격하기 위해 반포된 저 위대한 사회교서、「레룸 노바룸」도 레오 13세 교황께서 당시 전세계 주교들에게 신자들에게、그내용을 주지시키도록 시달했을때 일부 極保守 주교들은 그교서를 좌익시하여 거부하였다니 이 얼마나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 지금 이나라 교회지도자들은 아주 어려운 변화의시점、후세에 이르러 無知와 權力의 사람들도 역사적 비판을 받지않도록 전진하는 인로 이해하고 양들을 올바로 인도해가야 할것이기 때분이다. 이와같은 사정은 사제나 수도자ㆍ지도적인 평신도들에게도마 찬가지다. 오늘날 한국의 가틀릭교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문제로 주교단에서 평신도사회에이르기까지 매우 흔미한상황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같이 新舊의 인식의 차이가 근본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역시 시간의 흐름속에서 성숙해가는 지성의 진보를 통해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 현교회는 요한ㆍ바오로 2세께서도 79년 전교 주일 메시지에서 아래와 같이 명시하신다. 『복음으로 성장한 새로운 인간은 그가속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속에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수호자가 되고자 하는 의무를낍니다. 그러므로 복음화 작업이 지향하는 쇄신이 본질적으로 영신적인 것인데도 외그렇게 인류의 대다수를 괴롭히는 심각한 경제적인 분제와 사회적인 불의、불공평한 분제의 중심부에 교회가 뛰어들어가게되며 또 그해결에 공헌할수 있는것인지는 명백합니다. 전교와 인간발전이라는 말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읍니다』
현대에 이르러 교황들의 거의모든 교서들이 사회분제에 관한것들인 것만봐도 그리고 또 교회밖은 물론이고 교회안의 고위성직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문제의 실상과 긴급성을 인식하지 못한다해도 사회문제로 기실 오늘의 교회의 중대한 당면 과제로 나타나는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또 현 교황은 1980년에 교회표어를「진리안에서의 정의」로 정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정의와 평화에 대한 많은 말도 들었고 많은 행동도 보았다. 그러나 혼란이 거듭되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것은 정의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그러기에 참된진리위에 선 정의라야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와 정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행동에 선행하거나 적어도 병행하여야겠다. 여기에 오늘날 우리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하교 행동할때 留念해야할 核心이있는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그때 즉흥적이거나 피상적발언내지 행동보다는 좀더 신중하교 연구의 뒷받침을 받는것이어야 하겠다. 지도층은 더욱 그렇다 우리는 이시점에서 고루한 守舊도 무분별한 急進도 문제해결의 관건이 되지못함을 본다. 우리는 이시점에서 지난 경험들을 토대로하여 올바른 自我意識、自己正體性의 再定立이 필요한지 모른다. 우리는 계속슬기와 용기를 필요로한다. 특히각 분야에 걸쳐올바른 식견과 강인한의지의 지도자 양성시급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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