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한국의 傳敎는「君主의 종교는 곧 백성의 종교이다」라는 시대의 전교일수는 없으며 더 나아가 권력층과 금력층이 결부되어 화려한 외형이나 특혜를 받는식의 교회상으로 전교할 시기도 아니다. 앞으로의 전교는 각자의 자각위에서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그것은 국민거개가 고등교육을 받고 비판정신으로 수련되어 가기 때문에 그들의 비판의 여파를 거쳐 옮은 것으로 인정되고 공감되는 종교라야 받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다는 개인적 지성적 확신에 근거하여 개인의 자유결단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이점에 대해서 현 교황께서는 같은곳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형태의 탄압행위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해 왔읍니다. 사실 자유는 이 존엄성의 근본적이고도 필수적인 전체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동의에서만 솟아나올 수 있기때문입니다.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이 영혼깊은곳에서 가장 심오하고도 중요한 문제에대해 추구하는 모든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선교활동의 근본원칙 입니다.』사실 오늘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세계 어느나라의 젊은이들 못지않게 진리와 정의와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몇년전 某 명동본당신부님은 근년에 이르러 많은 젊은 엘리트들이 명동의 강좌를 메우며 수많은 유능한 젊은 학생들이 영세를 받는다고 하였다. 현대인들에 대한 전교는 역시 그들의 지성을 공감시키고 정의에의 의지에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을 교회가 구체적으로 보여줄 때 가능했다.
지난 3백년을 돌이켜서 구사회에서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면이 부지기수로 많았던것도 사실이다. 전교를 위한 전교 수도원 및 전교단체들의 속출, 세계 방방곡곡을 향한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의 파견, 병원과 학교들의 건설, 깊은 영성생활, 세계를 향한 교세의 비약적인 확장 등등 가톨릭으로서의 참면모를 史上유례없이 실현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시대사조의 흐름을 지휘하기는 커녕 그좋은 진리를 갖고도 지도자들의 無知와 안일한 사고때문에 멀리 뒤떨어져 있었음을 솔직이 인정할 수 밖에없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사조의 주류가 무신론이라는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현대정신의 특징중 가장 두드러진것은 批判精神이다. 데카르트에서 (소극적이긴 하지만) 연유 되었다고 봐야할 비판정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회의 품을 벗어나 불란서 대혁명으로 치달았고 또 비판정신은 결국 칸트에 이르러 저 유명한 비판 철학으로 집대성 되어 인간정신의 위대성을 과시 하였다. 그것은 드디어 自然ㆍ人文ㆍ社會諸科學에 직접간접으로 결적적 영향을 미치며 인류가 일찌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발전과 가히 異蹟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을 인류에게 선사 하였다. 다른 한 편 현대의 이런 비판정신을 외면한 교회측은 전진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성격 -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런것인데도 - 을 상실하고 復古的이며 背進的인 자세에 심취한 감이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품을 벗어난 인류사조의 흐름은 神無關心論내지는 無神論의 거센 潮流를 이루어 우리시대에 이르러서는 무신론이란 다만 사상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가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의 큰 부분으로지배하는 현시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우리는 이 엄청난 사건들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으나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진리의 종교이며 희망의 종교임을 알고 있기에 또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당신의 사람들이 이행하지 않을때는 다른 사람들(異敎徒)을 시켜서라도 성취시키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 결국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가 승리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분발한다.
다만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 뿐이다. 한마디로 교회가 지난 수세기동안 먼저 知性을 잃었고 그동안 급격한 템포로 산업화 되어가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어두웠기 때문에 노동층을 잃어버린것이 오늘의 서구사회에있어 교회 퇴조의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이제 전래 2백년이란 연륜을 쌓았다. 그러나 아직 성장도상에 있기때문에 미숙한점도 많다. 신도수는 1백만명을 넘는 교회가 되어 대견하기 이를데 없지만 3천 7백만이란 인구에 비교한다든지 특히 전 주교보다 1백년이나 뒤늦게 도래한 개신교의 신도수 6백만에 비교한다면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개신교측은 전래 1백주년을 계기로 1천만 신도 증가를 목표로 움직인다니 우리는 이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높이 평가하시어 가일층 전교에 분발해야겠다.
그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정통성을 이어오는 唯一無二한 眞敎 이면서도 신도들의 열성면에서도 뒤떨어져있어 반성할 점이 많다. 교회당數에 있어서나 그 분포지역에 있어서도 가톨릭교는 개신교와 비교가 안된다 현대사회를 산출해내는 모체인 학교만 하더라도 우리는 개신교와 수적으로나 종교교육면에 있어서 뒤떨어져있으며 지지부진한 상태다. 개신교 측에서는 교회 당국이 설립한 학교도 많지만 또 개인평신도가 설립한 학교들도 많으며 그러한 학교들도 교회당국이 설립한 학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해 운영하고 교육한다. 우리신도들에게는 아직 이런 싹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우리에게는 그런 劊意性을 발휘할 정신적 바탕과 교회 풍토가 조성돼있지않은 가보다 이러한 現實은 피땀을 흘려 이땅에 가톨릭 교회를 심어준 선교사들에게 감사하면서도 문화적내지 역사적의식을 갖지 못했던 그들의 세계관과 전교관을 치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후진현상은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저세상에서의 구원만이 역설되고 이 世界事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한데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제도적으로 너무 통제적이기 때문인것같다.
아직도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해 교육면을 비롯하여 여러분야에 걸쳐 할말이 많으나 지면관계상 여기서 그치며 아래와 같이 요약해 보고자 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나라의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직시하여 머지않아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할 知性層과 勞動者層에 대한 적절한 전교방법을 강구하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주교단에 바라고 싶은것은 제 2차 바티깐 공의회의 중이나 직후처럼 우왕좌왕하여 세계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정신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여 강력히 실천해갈 수 있는 力量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독일이나 미국등과 같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一致問題가 가장 절실한 문제도 아닐것이며 그렇다고 라틴계국가들에서처럼 원래 온 국민이 신자였기 때문에 주저앉은 신자들을 일으키는 일 즉 復興運動이 最急先務일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은 나름대로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필자의 愚見 으로는 역시 지금 이나라의 교회상황을 바오로사도가 세계를 편력하며 그물질하던 전교시기로 생각된다. 어디서든지 교회가 세워지기가 무섭게 滿堂을 이루는것이 실정이니 말이다. 지금 한국은 전교의 황금어장이며 황금시기를 맞았다. 그러므로 주교단은 천주교전래 2백주년을 지척에둔 이시기에 전교면을 중점으로 하여 교회 각분야에 걸친 2백주년 기념운동의 靑寫眞을 하루속히 제시하고 과감히 실천해주기를 바란다. 이기회에 주교단은 우리교회 시발점에 나타났던 조상들의 저 숭고한 교회영입 정신과 전교정신 그리고 순교정신을 고취시켜 주기바란다. 또 지금 한국천주교회가 겪고있는 진통, 즉 사회참여로 인한 혼란에 대해 주교단은 아주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의 愚見으로느 성직자도 한인간이며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무작정 성직자라는 일면만을 강조하여 교회권위 일변도로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현대 세계에 있어서는 교의와 윤리도 人智의 발전과 상황변화에 맞게 퍽 신축성있게 해석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것은 요구하되 시민적 자유와 각자의 지성적ㆍ양심적 소신들은 폭넓게 인정해 줘야할 것이다.
현대지성, 특히 성직자들은 스스로 眞僞와 善惡을 식별할 능력과 自己의 正體性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있으며 잘못될때는 스스로 수정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사회참여를 둘러싸고 성직자들간에 가끔대립내지는 양극현상도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에게 분열은 있을 수 없는것이므로 서로의 견해와 입장을 존중하고 다양성안에서의 사제단의 근본적 일치를 유지하여 현대세계에 있어서의 사제직 성숙성을 드러내줘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평신도들은 한국교회 초기에 나타났던 선조들의 저 숭고한 교회 영입정신과 전교정신, 그리고 순교정신을 再然시켜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에 더욱 넓게, 깊게 일하도록 온갖힘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특히 가톨릭 지성인들은 초기의 교회영입과 발전이 당대 이나라 최고의 지성들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지성계에 하느님의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심혈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
끝으로 주교단은 그 力量을 十分 발휘하여 이 뜻 깊은 교회 전래 2백주년을 교회 발전의 일대 전기로 삼아 그 막중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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