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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평양교구
②함흥ㆍ연길ㆍ덕원면속구
1949년 12월 24일、 평양시내 모든 성당들은 목자없는 성탄절을 지내야했다. 그해 5월 14일 당시 평양교구장 洪龍浩 주교를 체포한 북한괴뢰집단은 이미 9년초부터 북한교회 전역에 걸쳐 시작된 교회박해를 노골적으로 표출、12월 6일에는 평양시내 사제 7명 전원을 납치했기때문이다.
목자를잃은 슬픔과 시시각각 암울하고 참담하기만한 북한교회에서는 1949년의 성탄절은 그나마 공식적으로 보낼수 있었던 최후의 성탄절이었다. 그로부터 30여년、너무나도 작은 국토 대한민국 땅덩어리 위에 그어진 휴전선은 오늘도 변함없이 비탄과 슬픔과 원망과 희망을 집어삼킨채 거두어지지않는 장막처럼 무겁게 드리워져 통일에의 염원을 향한 실향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평양교구는 1927년 서울교구에서 분리、설정됐다. 한국에서는 네번째로 설정된 평양교구의 관할면적은 평안남북도 일원의 4만2천9백39㎞. 이 면적은 한국전체국토의 25%에 해당하는 실로 방대한것이었다
초대교구장은 메리놀외방전교회의 방 신부로 메리놀회는 23년 한국에 진출、 평양을 同전교회 전교지역으로 선정하고 교구설정에 따른 제반준비작업을 진행해오다 27년 교구설정과 더불어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전개했다.
교구설정 당시 평양의 신자는 여러 자료들을 통해 6천여 명으로 유추해볼수있는데 이에앞서 메리놀회가 진출한 23년경에는 평안도 전체인구인 2백30만3백61명중 신자가 4천8백90여 명으로 0.2%의 신자화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교세는 당시 신자수 5만으로 추산되었던 서북지방의 개신교신자수와 비교해볼때 극히 미력한 숫자이기는했으나 늦게 싹트기 시작했고 시작과 더불어 모진박해에 휘말렸던 관서지방으로서는 이제 막 뜀뛰기를 배운 아이처럼 힘차게 교세를 뻗어나갈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31년 메리놀회가 미국본부에 보낸 연말보고서에 의하면 교구설정당시 4개이던 본당이 4년동안 모두 14개로 거의 30%에 육박하는 증가율을 보이는등 평양교구 복음화는 눈부신발전과 선장을 거듭했다.
29년 성모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진남포에 海星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문화사업에대한 평양교구의「열심」은 17명의 신학생을 서울신학교에 위탁교육을 시키는 한편 로마에 유학생까지 보내 순교자의 피로 얼룩된 이땅에 복음의 꽃을 활짝 피우려는 뜨거운「열망」으로 발전했다.
1937년경 평양교구는 한국천주교전래 1백5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문화행사를 단독으로 개최、억세고 지기싫어하는 평안도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 태평양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땅의 복음화는 다시 어두운 그림자속에 잠기는 비운의 시기를 맞았다.
그런와중속에서 43년 홍용호 신부가 평양교구장으로 주교좌에 착좌하면서 어느때보다 활발한 전교활동을 전개、44년의 평양교구 신자수는 이미 2만8천4백 명을 육박、15%의 복음화율을 기록했다. 45년 해방기의 기쁨도 잠깐、조그만 땅덩어리는 38선을 가운데로 남과북으로갈리고말았다
북한공산정권은 50년 전쟁도발에 앞서 북한교회에 조직적 박해를 시작、6ㆍ25전야인 24일에는 남아있던 사제를 모두 체포하고말았다. 49년 홍주교를 비롯、평양교구 15명의 사제와 한국 최초인 영원한도움의 성모수녀회 초대원장 장정온 수녀 등도 남겨진 양떼를 버릴수없어 끝까지 남아있다가 죽음으로 신앙을 사수한 순교자들의 뒤를 따랐다.
의연히 공산집단에 항거했던 당시 북한교회 성직자들의 거룩한 희생은 북한에 남아있던 신자들에게 불굴의 힘과 용기를 주었으나 변함없는 침묵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침묵의 교회와 두고온 산천ㆍ부모형제를 그리는 실향교민들의 비탄과 슬픔은 30년이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고향을 등진후 10년、그리고 또 10년 한자리에 모이면 고향을 찾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어있던 실향교민들은 이제 그 피맺힌 염원을 뒤로미루었다. 그러나 점차 잊혀져가는 고향의 산과강 그리고 교회모습 등 고향을 잊을수 없는 평양교구 실향민들은 지난77년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아「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이라는 방대한작업을시작했다.
찬란하였고 애절하였으며 피어린 희생과 수난으로 점철된 교회모습을 남김없이 수록、 유산으로 남기기위한 평양교구사 편찬작업은 그동안 자료수집과 자금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전개、이제 출판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이 눈물의 작업은 살아서는 이미 포기한 고향산천의 생생한 모습과 숱한 애환을 담아 후대에 길이 전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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