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공의회는『확실히 복음은 행동적인 평신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서나 깊이 침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신도의 신분과 그 위치를 중시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신도 주일을 제정, 매년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평신도의 사명과 역할을 재확인 해오고 있다. 18일 제12회 평신도주일을 맞아 평신도가 나아가야할 길을 평신도와 성직자의 입을 통해 들어 보기로 한다.
<편집자註>
◆ 聖職者의 助言 - 최홍길 신부
使徒職에의 覺醒부족한 平信徒-啓蒙필요성 切實
信仰은 아직 自己中心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오늘(18일)은「평신도의 날」이다. 1968년 한국주교회의에서 이날을 제정한 이래 연12회가 된다. 사실 연중3백65일 모두가「평신도의 날」이지만 특별히 하루를 택하여 평신도사도직의 계몽과 촉진을 이루고자하는 이날의 뜻을 되새겨보면서 감히 오늘의 신자들에게 苦言을 드리고자한다.
멀지 않아 포교2백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자랑스러운 선교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제 신도 수에 있어서는 1백만이 넘은지 오래이고 교세의 신장도에서도 아시아에서는 가장 앞선 나라에 속한다.
또한 필리핀을 제외한 아시아의 10여개 국가가운데 인구對신자의 비율이 가장 두드러진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보여온 평신도들의 노고와 정성은 자못 눈부신바있으며 그 참여도와 활동 또한 괄목할만것 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성직자의 일손이 부족한 교회로서 평신도들의 사도직수행은 성직자들의 직능적 사도직을 도우는 일면에서 시종하여 왔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도들은자신이 처한 환경과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여야 할 일반적 사도직、평신도로서의 고유의 사도직에 대한 각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그 계몽의 필요성 또한 절실한 것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견지에서、오늘의 信者群의 모습과 그 사도직 활동의 부조화현상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1백 20만 가까운 한국 전체 신자들 가운데 매주 주일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하고 약속한 교무금을 내며 고백성사 등 성사생활을 제대로 행하는 신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한 교구의 예를 들면 전체신자의 3분의1이 조금 넘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3분의2가 되는 신자들은모두 교적만 남기고, 이젠 거리에서 만나도 도대체 알아보지 못할 복면을 쓰고 영영 어디론가 숨어버리고자 작정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리고 3분의1의 신자들에게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도시본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신자들이 성당뒷자리나 구석진데를 찾고자하고 주일미사단골지각생이 제일먼저 퇴장하는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할까.
모처럼 휴일이 되어도 그토록 바쁘기만 한 그들에게는 세상을 하직할 마지막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바오로 6세 성하께서는 교회 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 속이 텅텅 빈 이들을 가리켜「零點信者」곧「제로(Zero)신자」라고 하였다.
또한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루지 못하고 쉽게 좌지우지하는「갈대신자」아니면 판공 때만 등장하는「無名信者」그리고 성지순례와 같은 본당의 특별행사에 열심히 얼굴을 내미는「看板信者」등으로 대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도들이 한主流를 이루고 있는 신앙은 여전히 현세적이고 祈福的이며 자기중심적인데 머물러 있고, 또한 쉽게 無名人의 狀況속으로 빠져들고자 하여 마침내 개인간 극도의 파평화 현상을 초래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구 내 본당 내 諸단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많은 사도직 또는 신심단체들이 있지만 과연 그 모든 단체들이 단체 고유의 활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컨대 본당 내 사목회의가 있고 각분과별 모임도 갖지만 그 모임들이 모두 각각의 역할과 모임을 발휘하고 개별성원들 모두가 모임자체에 의미를 두며 생활하고 있는가. 모두들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하고자하는 것인데 단체는 각각의 단체들대로 개인은 개인 나름대로 유기적 연대감 없이 개별적인 수밖에 없는 여기에 우리의문제와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오늘의 우리교구와 본당이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사목의 부재현상을 빚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와 조직, 그리고 많은 단체나모임이 비 활력적 비 유기적인 것은 우리가 당장 풀어헤쳐 나가야 할 당면한 현실인 것이다.
공의회 이후로는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신분상으로 더 높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직분 상으로 서로다르다고 할뿐이다. 「평신도의 날」을 보내면서 포스파나불이고 강론을 하고 평신도 활동을 위한 2차 헌금을 거두는 연례행사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선교2백년이 되는 대망의 80년대를 전망하면서 평신도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땅의 교회-그 중흥의 계기를 도모할 것인가.
◆ 平信徒의 다짐 - 현석호 소장
世上의 빛ㆍ소금ㆍ누룩 돼야
平信徒사도직은 福音精神으로 現世秩序 完成하는것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왕대축일 전 주일을 平信徒의 날로 정하여 평신도의 사도직 수행을 강조해온지 이미 10여년을 지났다.
그동안 여러 가지의 교육과정과 활동을 통해 평신도의 意識化에 상당한 成就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신도대중에 있어서는 평신도의 自己使命의 確認에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고 느껴진다. 특히 제2차「바티깐」공의회에서 제정된 문헌에 대하여 認識이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먼저 평신도사도직의 기본적 사명에 관한 평신도 사도직 교령(제1장2항)에 의거하여 몇 가지 관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평신도는 세속에 살면서 세속 일에 파묻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는 세속을 떠나서 혹은 세속을 초월해서 특수한 직무에 몰두하지만 평신도는 세상 안에서 세상일에 전념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인간성화에 힘쓰며 현세질서를 복음정신으로 완성케 하고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證人이되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건설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그들의 고유의 사도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실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司祭職과 豫言織과 王織에 참여함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平信徒의 자기 身分에 관한 확고한 인식을 항상 다짐 해야겠다.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하늘나라 건설의 역군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그리스도로부터 召命을 받았다.
빛이 되는 데는 크고 작음의 구별이 없다. 흔히들 세상의 큰 빛이 되기를 원하는 욕망은 있어도 작은 빛이 되는 데는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 세상에 어둠이 있을 때에 그것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기보다는 먼저 한 자루의 촛불을 켜라는 명언이 있다. 그리고 또 남에게 빛을 주기위해서는 먼저 自己燃燒가 필요하다. 초가 자기 몸을 태워 사라지면서 빛을 내는 것과 같이 자기의 희생 없이는 남에게 빛이 될 수 없다.
또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짠맛을 주는 것과 썩는 것을 방지하는 것과 또 거기 따르나 자기 消減의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있다. 음식이 싱거워서 맛이 없을 때에 짠맛을 내어 식욕을 돋우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이세상과 같이 악행이 범람하는 곳에 바른말과 곧은 행위를 감행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變覺心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어야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는 길이다. 또 소금이 부패방지의 역할을 하듯이 복음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고 실천으로서 증거 할때 세상의 모든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의 調味料와 防腐劑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역시 소금이 녹아서 자기소멸이 있어야만 하듯이 우리도 自我抛樂의 정신이 없이는 소금의 역할을 하기는 어려울것 이다.
끝으로 세상에서의 누룩의 역할이란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누룩을 밀가루 서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은덩어리가 부풀어 올랐다」(마태13ㆍ33)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적은수의 신도들이 세상의 많은 비 크리스찬들 속에 들어가 거기서 복음의 증거가 될 만한 행동으로 발효하여 그 사람들을 크리스찬화 하거나 하느님나라의 공동 건설자가 되도록 하라는 뜻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인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하느님나라의 완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나라의 누룩이오 씨았이오 모델이오 또 하느님나라의 표지이오 도구의 역할을 하는 하느님나라의 성사와 같은 것이다. 평신도는 가정직장 기타각자의 전문분야에서 자기 나름의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 그 자리에서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선포하고 또 행동으로 증거 하면서 동시에 하느님나라의 가치에 위배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를 배제하는데 용감해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한 세상에의 봉사임무를 다하게 되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또 이러한 세상 안에서 모든 봉사적 생활과 활동을 靈的예배로서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평신도로서의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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