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順
①適應에의 몸부림
②閉鎖에서 開放으로
③1백만돌파의 虛實
④陣痛속의 成長
1970년대-이 10년동안 한국교회는 2천년간 침거해온「교회의 신성성」의보호벽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그 신성성과 더불어 세속성을솔직이 인정하고 끊임없는 쇄신을 다짐하며 시대와 사회의 적응속에서 인류구원이란 하느님백성의 새로운 사명을 찾아 나선、 생소하기만했던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새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속에 교회의 새 진로 설정에 몸부림치는 한편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주의의 팽배와 이에 따른 인간가치관의 전도속에「하느님나라 확정」이란 힘겨운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과 부작용을 낳기도했다. 이 기간은 80년대에 한국교회가 거두게될 포교2백년의 보다 알찬 결실을 위한 진통과 혼란、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방황속에서도눈에 띄게 큰 성장을 거듭해온 시련의 10년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 지난 10년간 한국교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한다.
반만년동안 차라리 체념에 가까웠이던 만성적인 가난의 굴레에서 헤어나 근대 선진국에로의 발돋움을 위해 온 국민이 허릿띠를 졸라매고 땀흘렸던 70년대-이10년동안 한국경제는 전세계 경제전문가들마저 경이적인 눈길을 보낼 정도로 급격한 성장을 이룩했다.
71년 2백66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79년말현재 1천4백95달러에 이를것으로 추산되고 있을 정도로 한국경제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특히 수출입국(輸出入國)의 기치아래 수출에 총력을 경주해온 결과 70년에 10억달러에 불과하던 수출고를 10년만에 1백50억달러선에까지 끌어올려놓았다. 실로 우리민족은 70년대에 들어 경제적으로 반만년동안의 긴 동면에서 깨어나 중진국대열에 들어서게되었고 80년대의 염원인 선진국에로의 도약을 위해 온 국민이 다시 땀을 흘리고있다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종래의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운 산업사회에로의 전환이란 대변혁기를 맞아 70년대 한국교회도 교회행정면을 비롯 사목방법 등에서 급변하는 사회변천에 적응하기위한 갖가지 움직임을 보이고 시작했고 특히 물질주의의 팽배로인한 사회부작용에 대처할 새로운 사목방법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시작했다.
먼저 교회는 70년대에들어 지금까지의 전근대적인 행정제도에서 탈피、행정면에서보다 합리적이고도 능률적인 운영방법을 모색하고 나섰다.
70년대초 전국상서국장회의는 지금까지 교구마다 각양각색이던 교구행정문서를 체계화ㆍ일원화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 행정문서의 통일화작업에들어갔다. 공업화과정에 따른 농촌인구의도회지유입(流入)등유동인구의급증현상은 교회내에도 전출입자의현저한증가결과를 가져왔고 이것은 본당 및교구간 행정서류 양식통일의 필요성을 절감케했던 것이다.
이에따라 한국교회는 교적부 등 14종의 각종 문서양식의 통일화 작업을 마무리짓고 71년부터 이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주교회의는 교구행정의 체계화와 능률화를위해 74년 교구 구조통일안을 확정、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종래의 주먹구구식의 원시적 행정에서 벗어나 고도의 산업사회에 적응할수 있는 태세를 갖추게되었다.
이처럼 외형적ㆍ제도적으로 추진해온 근대화작업과 병행、한국교회는 현대산업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목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조선조(朝鮮朝)의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공소사목형태에서 출발한 한국교회는 70년대초까지만해도 그 사목방법에서 전근대성을 면할수 없었던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70년대초 서강대학교 사회문제연구소에 의뢰、 실시한 종교사회 조사작업은 현대사회에 부응한 사목방법을 모색하기위한 한국교회의 노력을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할수있다. 1년7개월간의 힘든 작업끝에 71년9월에 발표된「종교사회조사보고서」는 70년대 한국교회 사목계획수립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고 할것이다.
전교나 기타 일선사목에서 구태의연한 방법에만 의존해오던 한국교회는 이 보고서를 통해 비로소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의 분석 및 검토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사회 조사보고서 작성의 의의는 높이 평가해야할것같다. 그러나 구체적인 계수(計數)나 자료에의한 과학적방법에 생소한 한국교회가 아직도 이를 일선사목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고있는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지않을수 없을것같다.
70년대에 들어 총력을 기울여 추진돼온 공업화정책의 결과 5천년간 유지돼온 농경사회의 질서는 서서히 무너져갔고 사회 경제적인면에서 많은 과도기적 혼란이 빚어졌다. 농촌인구의 도회지유입과 이에따른 농촌의 일손부족 및 도회지의 실업문제 그리고 70년대초까지만해도 수출산업은 값싼 노동력에 크게 의존할수밖에 없었던 결과 이로인한 근로조건을 에워싼 각종노사분규는 70년대에 들어 농ㆍ도간에 의무적인 인사교류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당사자의 능력과 의욕、 그리고 적성등을 도외시한 기계적 획일적인 사행정으로 인한 각종 위험부담을 안고있기는 했지만 70년대와같은 과도기적인 격변기에는 어쩔수없이 채택하지 않을수없었던 苦肉之策의 하나라고 봐야할것같다.
또한 70년대에 들어 농오촌본당을 지원하기위해 일부교구에서 처음 시도된 미사예물 공금화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안고있음에도 불구、 전국으로 파급돼갔고 그실시과정에서 지역특성에 맞게수정、보완되어 오늘날 농ㆍ어촌본당지원에 큰몫을 차지하고있다.
산업사회에로의 진행과정에서 신자들의 생활양태 및 생활권이 점차 다양화되고 다변화해짐에따라 종래의 엄격했던 혼백제도도 재검토되지 않을수없었다. 70년대에 들어 보이기 시작한 관면 혼배제도의 급격한 증가현상은 이러한 사회변천에 적응하려는 교회의 노력의 결과로 봐야할 것 같다.
또한 70년대말 수출산업의 호경기로 빚어진 인력난은 교회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저임금 속에서 희생과 봉사만을 강요당했던 교회기관 근로자들의 이직률이 높아졌던것이다. 특히 일부 교구는 일반기업수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전교사들의 급료를 해결할 길이 없게되자 교구내 全전교사를 퇴직토록 할수 밖에 없었고 여타 교구에도 유급 전교사제도는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있는 실정이어서 이에 대비한「전신자의 전교사化」란 새로운 숙제를 80년대 교회는 해결해 나가지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고도의 경제성장을 지향한 정부시책에 발맞추어 교회도 앞으로 도래할 도시화현상에 대비、 새로운 사목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70년대초에 이미 일부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강조됐다 그러나 무사와 안일에 젖어온 교회는 이 주장에 귀기울이려 들지않았고 예상을 뒤엎고 너무나도 빨리 닥쳐온 도시화 현상앞에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70년대를 보내게 됐다. 지금까지 중세기식의 지역 중심의 사목방법에 의존해오던 한국교회가 급격히 밀어닥친 도시화 현상에 여하히 적응할것인가는 80년대에 해결해 나가지않으면 안될 큰 숙제로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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