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順
①適應에의 몸부림
②閉鎖에서 開放으로
③1백만돌파의 虛實
④陣痛속의 成長
급격한 경제성장과 이를 뒷받침하기위한 공업화정책의 강행으로 70년대 한국사회에는 많은 부작용이 빚어졌다.
먼저 정신적으로 물질주의ㆍ황금만능주의가 팽배、우리겨례가 반만년동안 소중히 여겨왔던 정신적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기시작했다.
이러한 가치관의 전도속에 신의와 청빈을 소중히 여겨오던 조상전래의 유풍은 점차사라지고 불신과 부조리 풍조가 70년대초 한국사회 구석구석에 벌져갔다.
특히 정부가 外資에 의존한 공업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근대공업국가로서의 기반은 서서히 다져져갔으나 농업분야는 그 투자효율이 단기간에 기대될수 없다는 특수성 때문에 당국의 강력한 새마을사업지원에도 불구、70년대초까지만해도 농ㆍ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로인해 많은 농촌인구가 도회지로 유입됐고 이러한 현상은 농촌의 일손부족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나타내 농촌임금의 인상을 초래했다 뿐만아니라 극심한 일플레로 영농비지출 부담은 날로 높아지는데다 前근대적인 농산물 유통구조로 인해농민들은 2중의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적자영농은 자연히 증산의욕의 상실이란 결과로 나타났다.
이처럼 70년대초 농촌사회는 이농과 농촌임금의 인상、그리고 생산원가의 상승과 적자영농이란 악순환속에 날로 농촌을 등지는 농민의 숫자는 늘어만갔다.
이와 대조적으로 70년대초까지만해도 아직도 공업화의 기를이 채잡히지않았던 도회지는 넘치는 노동력을 감당하지 못해 실업율이 날로 높아만갔다. 수요에 넘치는 과잉노동력은 자연저임금문제를 낳게됐고 청소년및 부녀자들의 근로조건등은 70년대의 큰사회문제로 클로즈업 되었다.
기술과 자본의 축적없이 맨손으로 세계경제의 경쟁속에 뛰어든 한국 수출원가의 절감이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최대의 무기가 되었던것이다. 여기다 정부의 강력한 수출지원혜택까지 받게된 기업들은 날로 번창、기업의 규모는 해를 거듭 할 수록 눈덩이처럼 커져만가도 근로자의 임금인상은 한계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실정이었다.
경제기획원통계에따르면 75년 도시근로자의 월 평균 임금은 4만6천19원었는데 비해 도회지 가구당 월 평균지출은 6만5천3백10원에 달해 도시근로자는 매월 평균 1만9천여원의 적자가계에 시달려야했던것이다.
「소비가 美德이될 대망의70년대」를 바라보며 60년대에 애써 허리띠를 졸라매고 묵묵히 일해온 근로자들의 실망은 커질수밖에없었다.
더구나 73년1월 출산율의 조절을위한 낙태의 합법화로 인명경시풍조까지 가져왔고 이로인해 수많은 태아가 모자보건이란 美名下에 죽어갔다.
이와같은 70년대초 한국사회의온갖 부조리와 인명경시 풍조는 한국교회에 2백년 교회사상 가장힘든 짐이됐던 사회참여라는 새로운 십자가를 안겨주었다.
교회의 목적이 인간의 구원에 있지만 그인간이 지상의 사회체제 속에 살고있는한 교회의책무는 세상에살고있는 모든개개인에게 관계되는 동시에、또한 그사회적질서에도 관계되기 마련이라고 주장, 교회는 對사회적발언에 나서기시작했다.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교회울타리안에만 가두어놓고 對신자 사목에만 전념해오던 한국가톨릭이이땅에 복음전파된지 1백90여년만에 폐쇄의울타리를 벗고 전인류를 대상으로한 하느님나라의확장을 향해 예언자적 사명수행을 다짐하고 나선것이다.
이것은 그得과失이 어떠했든、한국교회사에 새로운 장을 열어준 역사적 사건이라 하지않을수없다. 그러나 이로인해 한국교회는 사회의 복음화、그리고 하느님나라의 확장이란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둔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못지 않게 너무나도 큰상처를 입게된 것도 사실이다.
70년대에 들어 간헐적으로 대사회 부조리시정을 촉구해온 교회는71년 11월「오늘의 不條理를 극복하자」는 주교단 교서를발표, 『혼미해진 사회질서를 적시하고 모든 크리스찬과 선의의 국민들이 각성하여 올바른 사회건설에 헌신할 것』을 촉구했다.
同年 평신도주일을 기해 한국주교단이 발표한 최초의 시국에 관한 교서인 同교서에서 주교단은『경제 발전과 사회발전이 병행하지않는곳에는 반드시 불안과 혼란이 따라오기 마련』이라고지적、『정의와 사랑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정한 사회정의를 가르쳐야할 사명감을 절감케 되었다』고 선언、공동선과 인간존엄성은 사회정의의 기본요소임을 상기시키고 이를 구현하기위해 교회가 앞장서 결의를 밝혔다.
이와같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많은소장사제들은 현실을 복음적 입장에서 관찰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복음의 재해석을 목적으로하는 성경연구모임을 갖기시작했다. 이들 젊은 사제들을 주축으로 한 정의구현사제단은 74년부터 기도회를 주관해왔다. 이기도회는 점차 전국 각 성당으로 번져가 70년대 한국교회는「기도회의 10년」이란 대명사를 낳기에 이르렀다.
이 기도회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후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대두、70년대 한국교회사에 두드러진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됐다.
한편 교회의 이러한 사회참여에 대한 70년대후반에들어 노장사제들을 주축으로한 또한편의 많은 사제들을 주축으로한 소위 구국사제단은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 정면 도전, 사회문제에대한 지나친 참여는 시간과공간을초월、교회가 그본질적 사명으로 삼아온 인간의 구령과는 무관한 정치활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노장사제들은 사회참여의영역은 교회의 초자연 복리와 직접적인 관계가있는 싱앙과 윤리、그리고 도덕에관계되는 부분을 국한돼야한다고 주장하고 사회참여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기도와、봉사자로서의 교회적 방법에 따라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소장사제들이 주축이된 소위 정의구현사제단은 교회가지향하는 초자연복리와、정치가 목표로하는 자연복리는 궁극에가서 깊은 관계를 맺고있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고 따라서 교회와 사회전반에관한 문제의 완전분리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사회참여의 당위성을 내세웠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이러한 예언자적사명의 수행은 순교자적 용기와 희생의바탕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맞섰다.
70년대후반에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사제들의 의견대립은 급기야 주교단의 의견마저 둘로 갈라놓게되어 소위 한국교회의의견의「양극화현상」을초래, 평신도들은 진보와 보수의 와중에서 갈피를 잡지못하는 혼란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극화현상은 70년대말인 금년에 더욱 날카롭게 나타나 공의회 교부들이 강조한「다양성안에서의 일치」가 실제로 얼마나 힘든과제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했다.
兩者가 모두 교회와 나라를 아끼고 또 이를위해 행동하면서도 서로의 의견과 행동은 극에서 극으로치닫기만했던 것이다.
주교단은 77년『상호견해의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야하고 형제적 사랑을 해치는 행위는 없어야한다』는 시국문제에관한 담화를 발표、내적일치를 호소했으나 진정한 일치의 기미는 좀처럼보이질 않았던것이 7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이제 70년대를 마지막 보내는 이마당에서 지상의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의가 확실한 모든 인간질서의 기반임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정의만으로는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질수 없고、또 진정한 평화와 초자연 복리를 얻을수 없다는데에 유의할 필요가 있을것같다. 그것은 초자연적 사회의 질서는 정의보다는 더높은 차원의 사랑이없이는 이루어질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전달하고 실천하는것을 사명으로하는 교회가 상호 미움으로찬 교회가 된다면 진정 이 사회의 구원은 누구의 힘으로 이룩될수 있을것인지-모두가 겸허한 자세로 반성해야할 것으로 보여진다.
때마침 전국적으로 일기시작한국민적 단합의 새 기운속에 80년대에는 진정「화해」와「일치」란 두단어가 새삼 강조될 필요가없는 세대가 되어주길 갈망하는 우리 모두의 여망을 안은채 진정한 화해와 일치가 아쉬웠던 70년대는 서서히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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