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속의 한해를 마무리짓는 이때에 영원한 하느님께서 시간속에 강생하신 외양간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리게하는 그리스도의 생신을 다시 한번 맞이하게된다. 하던일을 잠시 멈추고 재생을 걱정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도움을 청하고「임」의 사랑을 다짐하며 이웃을 좀더 철저히 존경하겠다는 삶을 걱정하는 마음도 큰 은총의 소산이라고 할것이다. 구유에 누워계신「아기」는 흔히 지도자들이 하는것처럼 실천성이없는 이론과 설교를 터뜨리지는 않지만 겸손과 사랑을 힘차게 설파한다
이분은 말은 하지않아도 실천을 내세우고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인간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의 양순과 겸손을 배워서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할것이다.
영국의 한 가톨릭작가 체스터톤이 자신에게 설교할 기회가 한번만이라도 주어지면 오만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했듯이 우리에게 자명하다. 교회는 옛부터 오만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했다. 인류의 조상이 처음으로 범한 원죄가 오만의 죄였으며 그 후손들인 우리는 같은 죄에 감격되었고 우리자신안에 교만의 씨앗을 보유하고있기 때문에 항상 心戰을 하지않는한 善에 항구할수없는 실정이다. 오만은 우리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가증스러운 惡이기 때문에 오만하다는 말조차 듣기 싫어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겸손의 덕을 쌓고 마음속의 저력을 간직한 인격자는 같은말을 듣고도 마음의 평화가 헝크러지지 않을만큼 양순하고 힘차다.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기때문에 무한한 거리를 좁히고 나약한 사람이되신 그리스도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겸덕을 호소하고있다. 진리편에 서있는 사람만이 진리를 깨우치고 성실한 사람만이 성실이 무엇인지 이해할수있다.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위해서는 마음속의 오만을 무너뜨리고 장애물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생의 眞意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위에서 내려주시는 마음의 평화를 차지하지 못할것이다. 움직이는 물속에는 물체의 영상이 똑바로 비치지못하고 흘러가는 물속에 비추어진 반달의 모습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할수밖에 없다. 구유에 누워계신분의 기쁜소식을 순수하게 듣고 깨우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마음을 동요케하는 교만을 사로잡고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할것이다. 똑똑하고 부유한 권력층과 고위층의 지도자들 만이 득세하고 판을치는 오늘의 세상에서 구유에서 나신「아기」는 劣勢에 몰리고 버림을받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빛을주시며 용기와 위로를 내려주신다. 구유에 누워계신 그리스도는 서민들의 편에 계시며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의 고통과 번뇌를 함께 나누고 계신다. 아무리 화려한 현대식의 성당일지라도 구유만은 서민생활의 상징인 초가집으로 꾸미게 될것이다. 크리스찬으로서 구유를 기념품과같이 보아넘기는 형식이라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구유의 그리스도께선 가난과 슬픔속에서 허덕이는 이웃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함께울고 함께위로하며 우리도 같은 심정을 가져줄것을 호소하며 불우한 이웃들에게서 안보이는 그리스도의 서민적 인간상을보고 우리 자신의 영적가난 즉 죄상을 보라고하신다.
가난한 이웃들을 볼때 우리자신이 주님대전에 헐벗은 죄인임을 보고저들을 도와줄때 우리자신이 은총을 힘입어 사죄함을 받고있다는것을 깨우칠수있다면 불우한 이웃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과 기쁨에 차있어야 할것이다. 빈천한 이웃들이 따뜻한사랑과 도움을 받는것을 보고 주님께서 우리죄인들에게 慈父的인 손길을 펴시고 개선의 길을 터주심을 감지할수있다면 저들에게 베푸는 다소(多少)의 선물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있다는 증거의 효력을 발휘할것이므로 종교적 차원에서 볼때 불우한 이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가 주님대전에 헐벗고 있는 죄인임을 표시해주고 저들을 돕는 훈훈한 인정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있다는 체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탄은 불우한 이웃들과 이들을 통하여 표시되는 죄인들(영적으로 가난한자들)이 물질적ㆍ정신적 구원을 맞이하고 있음을 약속하고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교회는 불우한 이웃을 도우라고 호소할것이다. 물론 구원을 위한 사랑의 외침은「혀」만 놀리는 설교여서는 안되겠지만 실천에 있어서도 크리스찬적 차원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실천이 중요하지만 행동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웃들에게 선물을 주는것보다서 앞선 그들의 고통을 함께나누고 덜어주어야한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따뜻한 방에서 잠자고 부족한 것이 전혀없이 사는 사람이 가난을 외치는 설교도 베들레헴의 웅변일 수 없지만 그런생활속에서 고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많은 물질을 나누어주고 희사한다고해도 크리스찬적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는이와 함께 울고、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동참과 공감의 마음이 크리스찬봉사의 특성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크리스찬들이 물질의 나눔보다 앞세워야할 고통의 나눔에 있어서 무관심하고 인색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구실로써 일정한 물질을 내어주고는 만족을 수정하기위해 거의 자취를 감추게된 단식재와 금육재와 기타 고통을 자청해보는 방법을 다시 찾는 길은 없을까?
아뭏든 괴로와하는 이웃을 괴로움없이 돕는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의 교회가 기아의 상태에서 허덕이는 이웃들을 베들레헴의 사랑과 연결할만한 참된 사랑을 갖는다면 그리스도의 생신날만이라도 이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할수있지않을까? 세상에 굶어죽는 사람이 있으면 살인자라고한 敎父의 말씀을 교황님과 주교님들이 재차 강조한지도 14년이나 지났다. (현대세계의 사목헌장69항)그후로도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기아상태에서 허덕이며 죽어가고있다면 자칭 살인자들이 할말이 또있겠는가? 아니면사목헌장의 말씀을 농담으로 알아들으라는 말인가? 말은 잘했지만 사랑이 없다고 자백하는것이 차라리 겸손한 태도가 아닐는지?
교회밖에서도 형제들이 서로 돕고부모의 영광을 드러냈다는 실화가 있다. 형과 동생이 매일 서로벼가마니를 날라다 주었기때문에 동생네집이나 형네집이나 벼가마니의 수가 좋지않았다는 실화는 그 자신들의 화목하고 행복한 마음도 말해주지만 그들을낳아서 잘 가르쳐준 부모에게 큰영광이 되는것이다.
물론 사정도 많고 변명도 많겠지만 도회지본당과 시골본당사이에 그리고 한 본당내에서의 신자들 사이에 성탄때만이라도「벼가마니」가오고 간다면 하늘높은 곳의 하느님께서 지상에서도 영광을 받으시게된다고 다짐할수있지 않겠는가?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면 이것을 보고 세상사람들은 당신들이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요한13ㆍ35) 「우리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말고 행동으로 서로사랑합시다」(요한1서 3ㆍ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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