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심의 신적차원(神的次元)은 계시와 은총으로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신앙은 인격적인 부르심에 대한 인격적인 대답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두 인격의 만남이라 할 수 있고, 이 만남에는 신적차원과 인간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 신적차원은 이미 고찰하였고 여기서는 인간적 차원을 고려한다.
인간은 영혼육신이 결합한 복잡한 존재이므로 신앙의 인간적 차원도 많은 미묘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1. 겸손 : 일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솔직하게 시인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참된 겸손은 필요 이상의 자기비하나 비굴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자신의 신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정직함이다.
따라서 교만한 인간은 결국 부정직한 인간이다. 또 겸손은 정당한 자존심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옳은 자존심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려는 심정이기 때문에 자존심 자체는 남용되지 않는 한 정당하고 정직한 것이다.
신앙에 포함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의 존재와 능력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우선적으로 받들겠다는 자세이다.
사실 매사에 자족하는 교만한 인간에게 종교심이나 신앙심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 본능적인 종교심으로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자에게 참된 신앙심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다.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자신을 섬기는 것이 왜 나쁜가? 이런 질문이 인간 생존을 위한 일상적인 일을 두고 하는 질문이라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이 인생의 궁극 목적을 두고 하는 질문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박에 없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동안 잘 살다가 죽어서 없어져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잘 살다가 죽음이라는 관문을 넘어서 하느님의 행복과 영광에 들어오라고 창조하셨으니, 인간의 작은 목적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 자신이므로, 인간이 자신을 인생의 궁극목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하는 것이다. 이 반역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신앙에 포함된 겸손은 먼저 하느님게 대한 정직한 자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연장되어서 성직자에 대한 과공(過恭)과 굴종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성직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증거하는 직임을 존경하여 공손하게 대하는 것은 좋지만 비굴하게 처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신자도 신원상(身元上) 성직자와 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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