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세계 가톨릭교회는 격동과 이변의 연속가운데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개혁들을 실천하는데 주력한 10년이었다. 과거 어느때보다 교회가 세계속에 그모습을 강하게 드러내 보인것도 70년대였으며 그만큼 현대세계가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것도 바로 70년대였다. 특히 70년대는 공의회 후 교회의 주역이었던 교황 바오로 6세가 15년간의 재위를 종식하고 이어 교황좌에 오른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회사상 보기 드물게 34일간이라는 극히 짧은 재위를 마쳤으며 교회사상 4백56년만에 처음 비이태리출신이 그리고 공산국가 출신으로는 최초로 폴란드의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된 그야말로 교황사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사건을 기록한 10년이었다. 70년대의 세계가톨릭을 近着외신을 종합, 되돌아 보기로 한다.
1970년대의 가톨릭교회는 완전히 한바퀴를 일주한것 같다. 그 10년간은 순례자 교황 바오로 6세의 해외 순례로 시작돼 역시 새로운 순례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해외 순방들로 끝났다. 그 사이에 특히 1975년 화해의 성년동안에는 수백만의 순례자들이「로마」를 여행했다.
위의 두 여행자 교황을 연결시키는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1세의 짧은 재위였다. 「미소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오로지 34일간이라는 짧은 재위동안에도 교황직에 새롭고 보다 평이한 양상을 드러내보였다.
바오로 6세로부터 요한 바오로 1세 그 다음에 요한 바오로 2세에게로 사도베드로의 좌가 물려진 것은 모두 78일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교황재위 15년은 그가「까스뗄산돌포」에 있는 하기별장에서 1978년 8월 6일 서거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의 후계자로는 당시 「베니스」 대교구장이던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이 8월 26일 선출됐으며 그는 34일만인 9월 28일 서거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뒤를 이어 10월 16일에는 교회사상 최초로 공산국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의 카를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됐으며 교황명을 요한 바오로 2세는 명명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523년이래 비이태리출신으로서는 최초의 교황이었다.
70년대가 출범했을때 바오로 6세는 홍콩ㆍ마닐라 그외 아시아지역 몇개 도시에 들른후 곧바로 호주를 방문했다. 교황이 호주 「시드니」에 발을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1963년 교황피선 이후 사람이 살고있는 모든 대륙에 대한 연속적인 방문을 끝마쳤으며 이로써 바오로 6세는 현대세계에서 이태리밖을 여행한 최초의 교황이되기도 했다.
70년대의 10년이 막을 내리려할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네번째 해외나들이로 터키방문을 막 끝냈었다. 1979년 한해동안 그는멕시코를 비롯 도미니카공화국ㆍ고국폴란드ㆍ아일랜드, 그리고 미국을 방문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자신의 첫회칙 「인류의 구원자」를 반포했으며 추기경단 특별회의를 소집하기도했다.
또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바오로 6세보다 더욱 빠르게 여행을 시작했으며 재임 첫해에 네차례나 해외여행을 한 것은 선임자의 두번에 비해 배를 기록한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순방들은 미증유의 미디어사건들이었으며 그리고 2개대륙 12개시를 방문했을때 그는 사람들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환호를 받았다.
종교계에서와 같이 세속세계에서도 1979년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해였던것 같다.
그는 수백만명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중대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강력하게 꺼리낌없이 이야기했다. 그의 강력한스타일은 80년대를 맞게됐다.
1979년은 확실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해였으나 그러나 70년대는 교황 바오로 6세의 10년이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후 교황이었으며 외관상 연약하기 짝이없는 양어깨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광범한 개혁들을 추진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로 6세는 선임자인 요한 23세나 후계자들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이 개방적이거나 독특한 스타일을 지니지는 않았으나 그는 끊임없이 교회내의 조화와 타신앙인들과의 일치를 추구했다.
재위동안 바오로 6세는 평화와 인권 그리고 종교의 『정당한 자유들』을 설득력 있게 또 가끔은 서스럼없이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일부에서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따른변혁이 매우 조속하고 또 여러면에서 있었으나 또다른 한편에서는 그것들이 충분히 먹혀들지 못했다.
1970년대 초기에는 60년대의 전례개혁들이 계속됐으며 그리고 새 미사전례ㆍ새 영세 및 흔인전례가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새 고백예절이 시작되기도 했다. 손이나 일등의 임의의 영성체와 같은 몇몇 변화들은 저항을 받기도 했으나 찬성을 얻었고 몇몇 시험적인 시도는 중지되기도했다. 바티깐은 미국에서 어린이들이 고백성사를 받기전에 영성체를 허락한 시도를 1971년 시험적으로 인가한후 1972년과 73학년도말을 기해 중단토록했다. 교회최고통치기구인 로마꾸리아의 개혁들이 단행됐으며 바오로 6세는 80세 이상의 추기경들이 꾸리아의 요직을 맡는 일과 교황선거참여를 금지시켰다.
이로인해 꾸리아의 완전히 국제화됐으며 그리고 세계의 교구들을 통치해온 주교들이 일선에서 물러난 반면 평신도나 하위성직자 그리고 수도자들이 점점 그역할이 늘어난것은 정책결정을 낳게했다.
일반적으로 70년대에는 사회적 행동주의로부터 보다 개인적인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계속됐다. 가톨릭성령쇄신운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경험하기도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로부터 교황직에 대한 전통주의자의 도전을 포함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교회의 답변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항명자 르페브르 대주교는 트리멘틴미사를 포기할 것과 또한 그가 스위스에 불법적으로 건립한 신학교를 해산시킬 것을 거부했다.
과거 성령수도회 총장이었으며 세네갈 「다카」 대교구장과 바티깐 외교관이었던 그는 금지된 미사를 공적으로 계속집전했으며 1976년 바오로 6세로부터 성무집행이 중지된 이후에도 자기추종자들을 서품했다. 한 가톨릭편집자가 『가톨릭의 신부는 대부분의 교회뉴스가 그러했으며 앞으로도 그로부터 나오게될 원료』 라고 표기했듯이 과연 70년대는 교회내에서 신부의역할이 끊임없이 촛점의 대상이됐다.
1970년 화란교계는 기혼자의 서품과 결혼한 사제들의 사제직 복귀문제 등을 놓고 바티간과 논쟁했다. 이에 대해 바오로 6세는 1971년 사제독신제를 재확인했으며 이문제가 그해 열렸던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독신제고수對 기혼사제서품 논쟁이 10년간 계속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10월 3일 「필라델피아」 에서 행한 연설에서 사제독신제를 재확인했으며 사제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도를 요청했다. 교황은 『사제직은 영원한 것이며 우리는 한번 받은 선물을 반환하지 않는다』고 미국사제들에게 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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