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영성사 안에서의 역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혼자서 하나의 영성학파를 형성하여 교회의 유익에 기여함으로써 영성사 안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고 있다. 학자들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프랑스의 르네상스로 하여금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화 하도록 하였고, 인문주의가 경건하게 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또한 르네상스와 근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으며 완덕, 성성, 수덕 및 신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방향 제시 등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영향을 미친 이들 중의 하나이다.
1)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신심의 보편성과 다양성에 대한 가르침은 참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약 4세기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천명하게 될 성성에의 보편성과 성화 및 영성의 다양성 교의를 앞서 밝힌 것이다. 그는 수도자 뿐 아니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든 계층의 평신도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에 나아갈 수 있음을 강조하며 수덕과 성화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였다.
2)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평신도의 영성에 관해 가르치고 글을 쓰게 된 최초의 영성 작가이다. 그 때까지 영성은 관상 수도자적 완덕의 삶으로 제한, 이해되고 있었기에 세상에 사는 평신도들에게는 요원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에 관한 저술가들은 속세와 관계를 끊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썼으며 또한 영성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속세와 관계를 끊는 수덕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세상에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지내면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영적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여러 세기 동안 제한적으로 이해되고 제약되어 온 수도생활적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망을 갖도록 하였다.
3)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쓴 「신심생활 입문」은 이미 2세기 앞서 쓰인 「준주 성범」과 함께 교회 안에서 필독서로 추천되고 아장 많이 애독되어 온 영성생활 지침서이다.
1619년 「신심생활 입문」의 완성판이 출간되자 불어권 지역에 금방 널리 보급되었고, 그의 생애 중 40판 이상 인쇄되었다. 이책은 당시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신자들 뿐 아니라 대다수의 성직자, 수도자들한테 높이 평가되었다. 프란치스코 주교를 늘 존경하던 왕 앙리 4세는 이 책이 자신의 기대를 훨씬 초월한 걸작이라고 격찬하였으며 왕후는 이 책 한 권을 금강석으로 장식하여 영국 왕에게 보냈다. 그 책은 곧 18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빨리 전파되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대변천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의 신자들로부터 고전적 신심서로 읽히며 사랑받고 있다.
「준주 성범」이 수도자적 완덕의 길을 위한 지침서라면, 「신심생활 입문」은 평신도 를 위한 영성생활의 안내서이다. 「준주 성범」이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지 않은 유익을 주는 고전적 교과서이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고독과 침묵 중에 복음 권고 덕의 서원을 지키며 완덕의 길을 걷는 수도자의 규범서라고 한다면, 한편 「신심생활 입문」은 수도자들을 위해 유익한 영적 입문서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세상 안에 살고 일하며 봉사하는 평신도들에게 참신한 영성을 제시하는 교본인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문장은 이해하기 쉽고 흥미를 끌면서도 세련미를 갖추고 있고, 그의 영적 가르침은 온전하고 중용적이다.
4)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수회원들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영성실천에 있어서는 다분히 이냐시오적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성서와 성전 그리고 교부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세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제노아의 성녀 가타리나, 필립보 네리의 작품들에 정통했고, 수덕 신비 신학 분야에서는 스페인학파의 저자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요한, 그라나다의 루도비꼬 등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사망 근 두 세기 후인 1859년 성 요한 보스노는 수도회를 창설하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라 부르며 그를 수호 성인으로 모셨다. 요한 보스코는 수호 성인의 영성 뿐 아니라 저서들을 통해 그분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를 수도회원들의 모범과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5)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가톨릭 신앙생활에서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써 지성에 치우쳐 신심행위가 타성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을 반성하고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인간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해주는 이성(異性)을 하느님의 귀한 선물로 여겼지만, 신심이란 정적 생활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에 신심 생활을 위해서 정적 측면을 소중히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을 장려하게 되었으며 차차 교회 안에 예수 성심 공경이 파급되어 갔다.
그가 설립한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예수 성심 신심의 사도 성녀 마리아 알라꼬끄(1647~1690)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6)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경건한 인문주의 사상을 통해 17세기 프랑스 교회와 그 주변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가 살던 시기의 사회는 그리스도교 정신이 희석되어 가는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거기엔 인문주의가 한 몫을 하였다. 자연과 학자들의 운동으로서 인문주의 뿐 아니라 진리의 미적 표현을 추구하는 교양 운동으로 이해되는 인문주의 방향도 그리스도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고 하였다. 인문주의는 인간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교 정신의 감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인문주의의 분리는 어느편을 위해서도 유익한 결가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리스도교가 인간성을 의심하고 거부하는 경우 영성생활에도 중요부분을 잃게 되며, 한편 인문주의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포기할 경우 그 기반과 전통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인물이 프란치스코였다. 그는 두 가지가 내적으로 상반된다고 믿지 않았다. 여러가지 대립을 화해시키는데 특별한 소질이 있던 그는 조화적인 성품으로 두 운동의 연결을 시도하였다. 자연과 초자연을 화해시키며 속된 영역과 거룩한 것에의 노력을 통일시키려는 그의 새로운 신심 이상은 바로 인문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융합에 있었다. 그것은 「경건한 인문주의」또는 「그리스도적 인문주의」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이는 신앙적 기반 위에 선 인문주의인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옴에 여러 형태와 인간성의 완성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인문주의적 신심운동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문주의를 신심행위에 유용하고자 노력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페츠라르카, 에라스무스 등이 이미 형성한 전통의 계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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