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헤어져 살아온 세월이 너무나 길어서 잘 헤아려지지 않는구려. 스물 일곱의 꽃다운 나이에서 예순 넷의 할머니가 되도록 생이별을 강요당해 온 당신에게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되겠지요』(38년간 복역후 출소한 장기수 안영기씨가 북에 있는 부인과 딸들에게 적은 편지 중에서)
비전향 장기수. 이들은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며 「통일 일꾼」임을 자부해왔다. 그래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0.75평짜리 독방. 이들은 세계 최장의 감옥살이와 전향공작 때의 고문으로 육신은 멍들고 저마다 지병을 얻었다.
출소 후에도 보호관찰 대상이었다. 나이 들어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다. 그나마 몸이 성한 사람은 공공근로를 하고 취로사업에 나가기도 했지만 인권, 종교단체가 마련한 거처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해야 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만남의 집」「우리 탕제원」은평구 갈현동의 「만남의 집」광주 「통일의 집」대전의 「형제의 집」등이 그곳이다. 하지만 이들이 마음 둘 곳은 아니었다. 고향과 가족이 있는 북으로 송환되기를 바랐다. 민가협 등 인권단체들도 92년부터 장기수들의 무조건 송환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8년만에 그 길이 열렸다. 지난 6월 30일 남북이 적십자회담을 통해 비전향장기수 가운데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장기수를 9월 초에 송환키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비전향장기수송환추진위원회(상임대표=권오헌)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생존하는 비전향장기수는 88명이다.
이들 가운데 56명과 전향각서를 썼다 취소의사를 밝힌 3명 등 모두 59명이 북한송환을 희망해왔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지난 6월 14일. 서울 관악구 봉헌동 「만남의 집」의 김석형(86)씨는 이 감격적인 순간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마치 꿈만 같다』며 벅차 오르는 감동을 전했다.
그러나 송환 희망자 대부분은 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족의 얼굴은 수십년 된 기억 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서울 봉천동 「우리 탕제원」의 류한욱(89)씨는 『동갑내기 처한테 통일되기 전에는 나를 볼 생각마라며 떠났다』고 밝히고 그러면서 『내가 살아 있으니 분명 살아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와 같은 기대감 뒷켬에 비전향 장기수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무거운 짐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동료 장기수들과 전향한 이들 때문이다. 함세환씨는 『좀더 일찍 남북 정상이 만났더라면 민족의 아픔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라며 『고향을 그리다 먼저 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안타까워 했다.
우용각씨는 41년, 장병락씨 37년, 양희철씨 36년. 지난 2월 25일 특사로 풀려난 17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던 세월을 합하면 모두 570년이나 된다. 한 사람당 평균 33년의 옥살이를 한 셈이다.
무슨 죄가 그리도 컸을까? 비전향 장기수들이 체포된 과정, 그리고 당시 적용된 법 조항 등은 그 의문을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50년 6월 인민군 해군하사관에 입대한 장병락(66)씨. 제대 후 선박 기관장으로 일하던 그는 62년 4월 정치공작원 안내선을 타고 내려오다 울산 서생포 해상에서 체포됐다. 그의 역할은 해상 안내원. 그 죄값으로 장씨는 37년동안 죄값을 치뤄야 했다. 장기수들 대부분 남쪽으로 향하던 도중이거나, 남파된 직푸 체포된 사람들이다.
그동안 상당수 비전향장기수들은 생계가 막막했다. 출소 후 겨우 주민등록을 하고 생활보고대상자로 지정받더라도 한달 10만원~20만원 정도 지원되는 생활비로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다 지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인권 및 종교단체 등의 지원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수십년만에 나온 장기수들이 사회에 적응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정부는 우리가 정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책적 배려조차 하지 않았어요』
어느 장기수의 절규 어린 외침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힘들게 한 것은 혹독한 고문도 배고픔도 아닌 정부의 집요한 감시의 눈길과 외로움이었다. 장기수들은 그 기나긴 세월동안 북에 두고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민족 분단의 희생자라 할 수 잇는 이땅의 장기수들. 이들의 아픔과 고뇌를 진정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한국 교회가 강조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그날이 활짝 펼쳐질 것이다. 이미 마음만은 고향으로 성큼 다가선 이들은 반쪽짜리 미완성의 봄이 아닌 모든 이가 하나된 강산에서 하나된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는 희망의 봄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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