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장 끝에 나오는 오늘 복음말씀은 분명히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히는 말씀이다. 단순히 『빵을 먹는다』라고만 말하지 않고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온다.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하며 「주님의 성찬[식사]」(1 고린 11,20) 예식을 가졋는데 이 때 「그리스도의 피」의 잔을 나누어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의 빵을 나누어 먹었다(참조: 1고린 10,16 사도 20,7).
인류 구원을 위하여 파견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을 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이 신비를 받아들여 믿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식사」라는 관점에서 잠시 묵상해 보자. 『먹고 마심』에 관한 우리의 일상체험을 곰곰이 반성해 보면 성체성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가장 분명한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먹고 마심」(영양섭취)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식사」 행위는 단지 생물학적 생명유지를 위한 행위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아마 아무도 의료기구를 통한 인공적 영양분 투여를 「식사」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식사」의 결정적인 구성요소인 「다른 사람들과 친교」라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바쁜 현대 생활 속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 되었지만, 본디 가족들에게 있어서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그들이 한 가족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하기야 「가족」이라는 말 대신에 「식구」라는 말도 쓰지 않는가.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새로운 사람과의 사귐도 식사 초대를 통하여 더욱 깊어진다. 즉 식사는 「친교」를 가져다준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 중에서도 「식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식사를 하셨다는 대목이 여러 곳에 나온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은 물론이고, 굶주린 백성들과도 함께 식사하셨고, 심지어 당대의 경건한 사람들이었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도 식사를 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식사행위를 통해 당신을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에서 아무도 쇠외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수난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마지막 일은 제자들과의 「식사」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오늘 복음은 썩어 없어질 생명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 영원히 계속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 예수님과의 「친교」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성체성사는 이 「친교」를 상징만 할뿐 아니라, 「친교」를 실제로 이루어준다는 것을 가르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성체성사 때의 빵과 포도주는 단지 하느님과의 친교와 참석자들 상호간의 인간적 친교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상징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친교를 이루어 주는 힘을 갖고 있는 『참된 양식이다』(요한 6,55) 이런 면에서 『대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더 힘있게 들려온다. 이레네오 성인께서 하셨다는 다음 말씀도 힘이 있다. 『곡식의 낟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싹이 트고 이 세상 만물을 장악하고 계신 하느님의 입김으로 번식하듯이, …. 우리의 몸음 성체성사를 통해 양육된 후 지상에 떠어져 썩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성부의 영광을 위해 부활시켜 주시는 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성 이레네오, 반이단론 5,2).
다른 한편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헌신」의 삶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이 사셨던 「사랑의 삶」을 살라는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거행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 얼마나 잘못된 태도인가! 일찍이 바오로 사도도 이런 문제를 당면하고 개탄하신 적이 있다(참조:1고린 11,17-22). 한 때 고린토 공동체 내에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부활하여 현양되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주님을 기념하여 「부활하여 현양되신 주님과의 친교」와 그 친교를 바탕으로 「신자들 서로간의 친교」와 사랑을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밝히 드러내어야 하는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 한편에서는 굶는 사람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잘 먹고 취한 사람이 있는 불미스러운 현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듣고, 바오로 사도는 그런 현상은, 결국 「하느님의 교회」를 경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강하게 개탄하였다(1고린 11,17-22 참조). 성찬기도 제3양식에 나오는 다음 기도처럼, 성체성사적 삶을 갈려고 우리 모두 노력해야겠다. 『그리스도 몸소 저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시어 … 모든 성인과 함께 상속을 받게 하소서』성체성사를 거행하는 데에는 한 시간도 채 안 걸린다. 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성체성사」를 실현하는 것은 한 평생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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