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성·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
「온유함의 성인」혹은 「신사 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해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인성, 영성 및 사목적 성숙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제1단계
젊은 사제 프란치스코는 샤블레 지방의 칼뱅주의자들을 개종시키는 임무를 자원해 맡으며 위험한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치 서적 외판원처럼 집집마다 돌면서 문틈으로 자신이 쓴 전도지를 밀어 넣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토론하고 강론하는 등 2년간 열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결실은 겨우 열 아홉명이 개종자였다. 그는 시몬처럼 이렇게 푸념할 수 밖에 없었다.
『주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루가 5,5)
▲제2단계
결실이 미흡하자 그는 선교방법을 바꿨다. 공권력을 선교에 이용하여 억지로라도 데려오는 방법(루가 14,23 참조)을 택하고자 한 것이다. 사보아의 공작이 자신의 속령인 샤블레 지방에서 공권력 행사에 동의하였다. 군주로서 그는 칼뱅파의 설교자들을 추방하고 신도들을 공직 채용에서 제외시켰으며 그들의 성서를 압수했다. 프란치스코를 대동하고 공작은 주민들을 광장에 집합시켜 칼뱅파의 신앙을 고수할 사람은 그 지역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강압적 방법은 샤블레 지역의 사람들 2000여명은 다시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선의에서 행한 것이라 변호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 큰 피해를 주며 안타깝게도 구원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있다고 믿었던 프란치스코에게 혈기 왕성한 정의감은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룩한 업적은 수적으로 볼때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방법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몬과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할 입장이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끈 매력적 온유함과 설득력을 갖추기까지엔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길고 엄한 자기 수련의 인고의 과정이 요청되었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생애 중 가톨릭 교회를 떠났던 칼뱅주의자들 7만 여명을 귀의시킨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여기엔 영욕(榮辱)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 제3단계
그는 천부적으로 사람 낚는 어부였다. 사도적 열성이 그를 사로잡아 그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주교로 축성된 후 사도적 방향을 바꾸었다. 이교도들은 개종시키는 선교보다 우선 교회 안에서 확신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 목표는 냉담한 신자들의 무관심을 일깨우고 해이해진 신자들에게 신앙을 견고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신앙을 선포하는 기존 방법을 바꿔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따라서 무엇보다 교리 교수법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신심의 다양성과 수덕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면서 모든 신분과 직업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완덕에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렇나 그의 가르침을 참신한 방법으로 서술한 「신심생활 입문」은 프랑스 뿐 아니라 주변 여러 나아에 선풍을 일으켰다.
▲ 제4단계
프란치스코는 인격적, 영적 발전에 큰 영향을 받은 한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녀 요한나 샹딸과의 우정관계였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녀의 우정 관계는 성인들 사이에서 가끔 있어온 일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와 요한나 샹딸의 우정은 성인들의 세계에 있어서도 매우 새로운 사건이어서 어떤 범주에 분류해야 할 지 당혹스럽다. 이 두 성인을 서로 연결한 독특한 체험은 프란치스코 뿐 아니라 요한나 역시 비상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디죵 시 부르궁디 의회 의장의 딸이었으며 샹딸 남작의 미망인이던 요한나는 1604년 32세 때 마침 디죵 시 친정에 머물러 있던 동안 그 곳에 사순절 강론을 하러 온 프란치스코 주교를 처름 만났다.
이 때부터 두 성인 사이에는 세상에서 드문 우정이 맺어졌다. 두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그들의 관계가 용납될 수 있는지 대답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식별하느라 분투하였으며 결국 하느님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믿었다. 요한나는 총 고해를 한 후 프란치스코의 모든 지시에 순종하기로 서원했다. 한편 프란치스코는 항상 그녀를 사랑 안에서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의 영혼이 그녀에게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것은 오늘 가톨릭 교회에서 생각할 수 없는 영적 결혼으로서 바로크 시대에나 주교가 체험할 수 있었음직한 것이다.
두 성인의 우정 관계는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공동 작업 안에서 연결되어 구체화된다. 그것은 처녀들과 미망인들을 위한 「성모 방문회」의 창립을 위한 협동 작업이었다.
그들 간의 영적 우정의 순화는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등 스페인의 신비주의자들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들이 쓴 책에서 하느님이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프란치스코는 점점 매력을 더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요한나에게 그들의 정다운 영혼의 일치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큰 시련을 겪으며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하느님이 우리 사이에 맺어주신 우정이나 영적 결합에 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라는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받은 요한나는 그것을 십자가로 받아들였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묵묵히 그리고 충실하게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들의 우정을 자신들의 개인적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상호의 인간적, 영적 성숙과 사도직 사명 수행을 위해 유익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정을 영원에 이르는 다리로 체험했으며 우정의 도움으로 그는 더욱 긴밀히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제5단계
성 프란치스코는 특출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우선 인간의 심성을 읽는 직관력과 영의 움직임에 대한 식별력, 지성 그리고 설득력 있는 말씀의 은사 등을 타고났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인내, 온유함의 자세를 키웠으며 끊임없이 공부했고 많은 것을 체험했다. 그는 신심(영성)의 다양성, 성성의 본질과 단계, 성화의 방법 등에 대한 지식과 교회의 정통한 가르침에 입각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당시의 사람들의 사고에 가까이 접근시키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그는 영적 지도자에게 모범적 삶이 무엇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고 있었다.
실로 프란치스코는 근대적 영적 지도자의 사부라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온유하고 친절한 자세로 도왔으며 강론과 저서 그리고 편지들을 통해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 지도 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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