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최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국내 상당수 인사들에게 평화공세 서신을 보낸 바 있다. 이를 계기로 본사는 지난 연말 국토통일원이 주최한 「북한의 종교」 애대한 학술토의에서 최석우 신부가 발표한 「북한의 천주교」 에 대한 강의 내용을 통해 赤化의 북한-침묵의 교회 실태를 알아보기로 한다.
북한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안은 아직 종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은 없었고 따라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공산화의 프로그램에 종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을리는 없었다.
다만 종교정책이란 다른 정책처럼 일시에 단행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수행되게 되어있었으므로 아직은 그 전모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소련군으로도 그 어려운 정책을 스스로 관철시키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북한공산화의 첫 단계는 토지개혁이었다. (1946년) 이로써 모든 종교단체는 그들이 소유하던 재산을 대부분 잃어야했다. 천주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드러진 예로 덕원의 분도수도원은 건물과 대지를 제하고는 모든 토지를 빼앗겼다.
생계마저 위협받게 된 수도원으로서는 토지개혁이 불쉐비즘의 근본정책의 하나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일단은 소련군당국에 항의해 보았으나 예측대로 허사였다.
소련군의 주둔기에 있어서 서서히 그러나 간단없이 실시된「반종교투쟁」은 대략 이러한 것들이었다.
①모든 국민은 6세 때부터의 종교를 밝혀야했다. 그리고 그것은 외출시에 반드시 지녀야하는 신분증명서에 명기되었다. 이후 종교인은 직장과 관청에서 차별대우를 받았고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공직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②밀정제도로 인하여 특히 선교사들은 밀정군에 포위되어 있었고 공장이나 관청에 다니는 신자들은 엄한 감시를 받았다. 교회주변에는 주일엔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내무서와 소련군에서 보낸 탐정군들도 들끓었다.
③소위 사상교양사업으로 특히 학교와 공장에서 유물론을 가르치며 반종교적인 선전을 일삼았다. 미사와 주일학교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주일 오전을 택하여 회의와 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북한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1948년 9월) 「淸算」이란 새로운 탄압이가 해지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북한 각처에서 종교인의 종교자유투쟁이 불타오르게 되었다. 열렬한 신자들에게는 청산이 도무지 두렵지 않았으나 미지근한 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그러한 신자들 중에서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청년들은 남다른 사회적 압박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투쟁하였다. 그들은 이미「기독교도 연맹」이나 노동당에 가입하도록 강요당한 적이 있었으나 이를 거부했었다.
천주교 청년들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공산체제에 동화되거나 삽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인 신부와 선교사들은 북한의 독립된 정권의 수립으로 38선이 일층 견고하여지자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임지를 사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신자들 중에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남아있는 신자들은 감시와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용감히 신앙생활을 계속하여 열심히 성당에 나갔다. 그래서 주일과 축일이면 성당은 아직 신자들로 가득 찼다.
종교자유의 슬로우건은 북한의 이전 헌법(1948ㆍ8월)에도 삽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법에 보증된 종교자유를 들어 항의하면 공산당들은 으레 국가이익을 먼저 내세웠다.
그러므로 그들이 허용하는 종교자유에는 반드시「국가이익과 부합하는 한」에서라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해방당시 한국천주교인의 총수는 약19만, 그중에서 북한의 신자수는 최소한 5만으로 추산할 수 있을 것이다. 교구로 말하면 평양교구 (평안남북도 관할) 덕원교구 (덕원수도원 관할) 이렇게 3개교구가 있었다. 평양교구는 한국인 주교와 신부들이, 그리고 덕원과 항흥교구는 독일 분도회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는데 함흥교구장은 덕원수도원의 대원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나머지 황해도는 서울교구 소속이었다.
북한의 공산정권은 우선 덕원수도원을 몰수하고 자외면상의 법적구실을 찾기 위해 술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48년 11월말 수도원의 경리담당 엄(ELK) 신부가 불법으로 포도주를 생산하고 탈세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포도주를 생산하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요청해온 때문이었다.
다음해 4월 중순에는 수도원의 인쇄소책임자 피숴(Fischer) 수사가 체포되었다. 「불온물인쇄」 의 죄목이었다. 사실 수개월전에 반공삐라와 반공자명단을 인쇄한 적이 있었다. 동년 5월 9일 밤중에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을 습격, 辛(Sauer) 주교와 3명의 신부를 납치하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점령하였다. (그 후 공산당은 사리원동과대학을 수도원으로 옮기고 김일성 농과대학으로 부르고 있다 ) 2일 후에는 남은 독일인신부ㆍ수사 전원, 그리고 함께 있던 한국인신부 4명을 체포하는 한편 원산 고산 고원 영흥 흥남 함흥에서 신부 수사 수녀들 모두 체포하니 그 수는 67명에 이르렀다. 한편 한국인 신학생 수사 수녀는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모두 추방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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