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 생김새가 벌써 다른 동물과 다르다。모든 동물들은 머리가 옆으로 붙어있지마는 인간의 머리는 하늘로 향하게 되어 있다。이것은 인간이 비록이 세상에 살지마는 하늘을 그리워하는 유일한 존재-다시 말해서 두발은 땅을 딛고 있지마는 하늘을 보고서는 무한의 갈망, 영원한 이상의 추구, 영원한 생명에의 동경, 이것들이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이유이며 동시에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가치관의 핵심임을 일러주는 것일 것이다。
『영원한 삶의 영원』인간이 이 문제를 제시하지마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 불가능이란 인간 한계점 앞에 더욱 인간은 자신의 부조리를 느끼지 않을수없는문제!
삶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동시에 우리로서는 어찌해 볼 수없는 인간능력을 좌우하는 신비의 차원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생명」그 자체가 신비스러운 대상이다。즉 인간의 과학으로나 철학으로 또는 예술문학의 차원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초월적인 개념이다。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삶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삶의 피조물이라는 대전제를 내걸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내생명은 결코 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요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객관적인 다른 존재에 의해서 주어진 생명이다。그래서 어떤 철인은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도 하고 있다。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의 삶과 죽음은 나의 운명이지만 독단으로는 어떻게 규정을 지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 자체도 시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차원의 것이다。그러니 나의 삶과 죽음은 나에게 그것을 주신 그분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나의 의사와는 전연 관계없이 주신 그분의 의도와 그분의 초월적인 차원에서만이 가능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신비스러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이러한 신비스러운 절대자와의 관계적 생명의 주인공이신 그분과의 삶과 죽음의 관계를 우리는 종교 또는 신앙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는 과학의 분야가 아니고 절대자와의 관계인 신비의 분야에 속한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적어도 그리스도교 경우의 신앙핵심은 결국 삶과 죽음의 궁극적인 의미와 연결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생명의 근원이신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곧 신앙의 핵심으로 표현된다.。그러므로 생명을 창조하신 그분의 손길이 나에게 닿을 때 우리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한 알의 씨앗이 그릇 속에 있을 때에는 아직 새로운 싹을 가질 수 없지마는 그것이 땅속에 들어가 수분과 기타 자연조건이 마주칠 때에 드디어 그 씨앗에서는 싹이 트듯이 영원한 삶의 영원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생명의 영원한 긍정의 길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능력이 나에게 주어질 때 트여지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신앙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의미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앙은 영원한 생명의 관문」이다。그런데 실상 우리 크리스천들이 「영생」이란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것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느끼고있는가가 문제이다。
19세기말 미국의 저술가인 채님(WㆍEㆍChanning)은 「영생의 길은 그리스도교의 영광스러운 발견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다면 그 누구도 영원한 삶의 길을 찾고있으면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 승리가 그의 부활로써 장식되었다면 그는 분명히 죽음의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생명의 근원이 없음은 틀림없다。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 즉 그분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에게 닿을 때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이것이 소위 「부활신앙의 가신 성(可信性)」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빵을 얻어먹기 위함도 아니요 육체적인 잠정적 치유를 노리는 것도 아니요 바로 그가 소유하는 영원한 생명에 끼어들기 위함이다。단순히 표현해서 중병환자가 자기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가듯이 내생명의 궁극적인 긍정의 길이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고 있다。
「우리는 죽지마는 다시 살아난다.」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이것은 곧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아무도 말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도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
「우리 크리스천은 진정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이거야말로 우리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요, 이상이요, 목적이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닐 수 없다。그래서 나는 크리스천을 이렇게 정의한다.。「신앙인은 영원한 희망의 주인공이요, 절대적인 가치의 소유자들이다」
진정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면 어떠한 역경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으며 진정 신앙의 은혜에 감사하고 살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많은 신앙인들이 그 신앙의 핵심을 생활과는 관계없이 입으로 외는 피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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