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敎會는「宣敎하는교회」
한국교회의 사명은 복음 선교를 통해서 실현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에로의 파견에 뿌리박은 「선교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부께서 성자를 인류의 구원을 위해 파견한 것에서 기원을 가지며 구원의 공동체로서 만민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어있다. 따라서 만민에의 복음 선교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과 생명력이 역사의 흐름 가운데서 성령에 의한 새로운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판단하는 참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만큼 교회의 선교적 책임은 중대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활동은 밀려오는 새로운 상황과 새 시대에 불가피하게 부딪히고 있다.
우리교회는 근래사회가 산업화되면서 도시화 현상이라는 사회구조의급격한 변화를 겪음으로써 복음 선교에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확실히 새로운 형태를 탐구하고 있는 선교활동의 가능성과 그것에의 도전은 우리한국의 모든 하느님 백성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토양에 적합한 선교活動을
그뿐 아니라 복음을 선교하는 것은 밭에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과 같은 것임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 한 바 있거니와 한국교회도 복음의 씨앗을 뿌릴 한국인의 마음 밭의 성질을 잘팍하고 그 토양에 적합한 선교활동으로 복음의 씨가 잘 자도록 하여야 함은 당연한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교회가 구라파교회의 확장이 아닐진대 우리의 생활 사상문화 풍속습관을 예사로 여기고 외국신자들의 외면적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移植한다면 그 결과는 뻔 하다는 일이다. 예컨대 구라파에서 발전한 교회의 신학적 , 제도적 형태를 直播하여 교회기구라든가 신학의 방향에 맹종함으로써 우리 땅의 독자적인 전통과 민족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되기 쉽다는 말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전체교회와 다른 모든 교회의 이익에 대해 참형제로서의 공동책임을 수행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는 선교교령에서 『자기 백성의 풍습과 전통예지와 지식 ㆍ기술ㆍ훈련 등에서 유용한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라고 선언한데 이어 『혼합주의와 거짓 개별주의가 배척되며 그리스도적 생활이 각민족의 문화적 재능과 특질에 적합 될 것이며 또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진 고유의 특질과 개개의 전통이 가톨릭 적일 치에로 흡수될 것이다 』 (선교교령2)라고 확언하고 있다.
정말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성령의 작용 아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그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전달하려는 것이지, 결코 어떤 모양이든 간에 서양적인 것을 그대로 전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교회는 새로운 형태이긴 하나 우리의 고유한 전통에 기초하여 『복음의 가르침을 한국인의 생활에 적합토록 변역할 필요가 있을』(세계주교회의 교부들의 선언)뿐 아니다 그 복음을 실현해야하겠다.
가톨릭性이란 복음이 어떠한 문화에도 뿌리를 박고 각양각색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전세계에 향토 색칠은 지역 교회의 번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국민의 사회상황은 사회정의와 경제 사회 정치 문화 교육 등의 차원에서 전인건의 진보 발전을 위해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을 지향하는 복음 선교는 특별히 현대에 있어서는 인간의 참 계발과 해방에의 배려와도 관련돼 있어야한다. 제4차 세계 주교표회의는 인간의 해방및 계발과 복음 선교 사이는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확인했고 또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에서 『복음 선교에 있어서 정의 해방 계발 평화의 여러 문제들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거나 무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나로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읍니다』 (31장)라고 밝혔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전체를 구원하는 주님이고 선교의 효과는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이기에 복음 선교는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에로 해방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악으로부터도 해방시키는 것이다. 즉 빈곤 질병 전쟁 인간과 그 존엄과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말이다. 만일 절치나 사회체제가 부정하게 억압적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보유하면서 생활할 수 있게 그것을 변혁하여야한다. 그러기위해 교회는 복음의 빛에 비추어서 어떠한 제도적 개조가 요구되고 있는지 겸허하게 진리의 성령께 의탁해서 식별하도록 애써야한다.
만일 복음의 본질적 가르침이 엄밀하게 지켜진다면 설사 교회가 보다 좋은 사회질서의 건설을 위해 인간적인 투쟁에 참가한다 하더라고 교회의 영적메시지를 흐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까지 할까닭이없다 .
그런데 우리교회의 밑바닥에는 교회 활동의 직접적인 영역을 순전히 영적이며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흐름이 있다. 이것은 교회가 자기방위와 예비선교에 필요한가. 이외의 세상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어쨌든「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갈아입고 올바르고 거국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새사람」 (에베소4ㆍ24)은 예수를 추억하며 그리스도를 닮아야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추억은 묶인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 先取이며 해방의 추억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또 경제적 해방의 과제는 마땅히 복음 선교의 실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오로 6세가 사도적 권고 17절에서『복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교리를 가르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기타 성사를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려는 경향을 삭별이 유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결코 복음 선교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여 신자수를 증가시키는 것만이 거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原始宗敎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한국인은 거의가 샤머니즘이라는 민족의 신앙에 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불교적 심성에 사로잡혀있고 또 유교적 윤리가 생활양식의 根幹을 이루고 있다.
특히 한국인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있는 종교는 샤머니즘이며 다른 모든 종교는 이 토대위에 세워진 상층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도 무의식속에 샤머니즘에 사로 잡혀있는 수가 많다.
이렇게 오늘날 한국의 여러 종교는 민중들의 생활 깊숙이 살아 활동하고 있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도 『여러 민족 안에는 자연계의 변화와 인생의 여러 사건 가운데에 현존하는 신비적인 힘에 대한 어떤 느낌이 보이고, 이 느낌과 인식은 그 국민 생활에 깊은 종교정서로서 침투하고 있다』라고 선언하며 원시종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우리들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과 긴장과 갈등속에서 접촉하는 상황에서 살아왔다. 실로 한국역사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2백 년 동안 자라서 성년기에 접어들고 있는데 과연 그 역사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 확실히 우리 한국교회는 피로써 물들인 이 땅위에서 피의 꽃을 가꾸며 고통의 역사를 살아서 겨우 다른 종교와의 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 공존하고 있다.
他宗敎와의 겸허한 對話를
따라서 우리는 다른 종교의 행동과 생활양식뿐 아니라 계율과 교리를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보아야하겠다. (비그리스도교 선언)
그 제종교 가운데에도 인간의 양심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과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들안에 있는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계시와 은총에 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관점과 아울러 신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통해서 당연히 하느님의 「구원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의 사람들에게도 구원에 이르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종교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겸손히 하고 또 모든 하느님의 백성도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참되게 종교적으로 대화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때 한국교회는 복음 선교를 의미 깊고 인간답게 보편적인 것으로 할 수 있다.
한국敎誨師는 하느님百姓의 歷史
선교2백주년의 기념행사를 한국시노두스를 통해 내실화하기 위해서는 복음 선교라는 측면에서 다음 몇 가지를 반성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첫째 복음 선교의 어제와 오늘의 상황은 어떠한가, 또 그 방식 형태 내용은 이대로 좋은가. 그리고 내일의 비전은 무엇인가?
둘째 한국교회는 관연이 땅에 뿌리를 박을 수 있을 만큼 토착화하였는가? 또 어떻게 토착화해야하는가.
어째 교리와 신학은 이 땅의 토양에 잘 맞고 있는가? 교리서는 그대로 좋은가?
넷째 홍보활동은, 정보화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복음 선교적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가?
다섯째 타종교를 이해하고 그 종교와 대화를 나누며 복음 선교적 사명을 다하였는가?
여섯째 한국교회사에서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개념 규정한다면 이 땅에 사는 하느님백성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교회사는 교회 정치사적 관점에서 떠나 성령이 주어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장래를 향해 전진하며 2백 년 동안 살아온 교회의 내적발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 같고 또 끊임없이 변형하는 교회 상을 중요시하며 미래에의 예언적 역할을 지닌 교회의 비젼을 제시할 수 있게 서술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만 한국교회사가 역사경험적인 교회의 생명표현으로서 확인 될 수도 있는 동시에 구세사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선교2백주년을 맞는 오늘에 있어서 한국교회사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로 서술되어 이 땅에서 그 백성들이 희망의 변명자로서 복음을 증명하는 구체적 모습가운데서 성령이 이끄는 생명의 내적 흐름을 밝혀야 걷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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