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서양 문화권에서 수도회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베네딕또 성인의 탄신 1천5백주년을 지내는 해이다. 그래서 금년을 베네딕또의 해로 정하고 이 성스러운 해를 뜻있게 보내기위해 세계도처에서 베네딕또수도회원들은 심포지움ㆍ출판물ㆍ매스콤 등 다양한 기념사업과 행사로 베네딕또 수도규칙의 부를 재현하고 베네딕또가 유럽에 끼친 영향을 재천명하며 베네딕또의 후예로서 그의 유업을 어떻게 계승하고 당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연구 발표하기로 되어 있다. 이 행사는 3월 21일 베네딕또의 별세 축일에 개막되어 지역별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9월에는「로마」에서 세계 베네딕또 대수도원 아바스 총회가 개최되고 이어서 9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심포지움이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녹음이 짙어지고 더위를 몹시 느낄 때쯤 베네딕또의 후예들은 7월 11일 사부의 대축일이 나온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성인의 탄신 1천5백주년이 되는 해의 7월 11일을 그대로 넘기기가 아쉬워 그의 생애와 그의 수도규칙서에 담겨 있는 이념과 그의 후예들에 관해서 알아본다.
聖人의 生涯
베네디또 성인에 관해 진실성이 보증되는 문헌은 2권 있다. 그 하나는 성인이 직접 집필한 수도 규칙서이고 다른 하나는 성인이 선종한지 40여년이 경과한 후, 5백93년에 그레고리우 대교황이 기록한 대화체 성인전이다. 그레고리우 대교황은 4권은 모두 베네딕또 성인에 관한 기록이다. 이 대화집은 대부분 성인의 기적을 중심으로 집필됐기 때문에 상세한 연대나 그 외에도 무수하게 있을 법한 사적들은 아직도 미궁에 잠겨 있는 것이다.
베네딕또 성인은 4백8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천5백 년 전 이태리의 한 촌락인 누르시어(NOURISH)에서 지체 높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소년 베네딕또는 입신출세의 대망을 품고「로마」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복잡한 처지에 있었고 그 와중(渦中)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입신출세의 길을 찾아 경쟁을 하고 있었다.
「로마」의 훌륭한 공무원이 되어 출세하려 했던 소년 베네딕또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봉착했다. 「로마」에 온 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과 세상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할 것 아니지 …베네딕또는 하느님을 택했다.
입신출세를 포기한 그는 문화와 학문의 요람인「로마」를 떠나「엔 피데」로 갔다.「엔 피데」에서 그는 산산조각이 난 체를 말끔하게 원상대로 만든 기적을 행하였다. 이것이 베네딕또 성인의 첫 기적이다. 이 기적의 소문이 퍼져 나가 떠들썩하게 되자 그는 한적한 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수비야꼬 동굴이다. 수비야 꼬는「로마」에서 동쪽으로 약60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는 산악 지대이다. 수비야꼬 동굴에서 그는 3년간 은수 생활을 했다,
수비야꼬 은수 생활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젊은 베네딕또는 어느 날 갑자기 가슴이 터질 정도로 맹렬한 정욕을 느껴 근처에 있는 가시덤불에 알몸을 던지고 육욕의 불꽃이 꺼질 때까지 굴었다. 그리하여 가시덤불에서 나왔을때엔은 몸에서 유혈이 낭자했었다. 성인의 명성은 얼마 안가서 알려져 인근에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거기서 그는 12개의 수도 단체를 형성하고 그들을 지도했다. 수비야꼬에서 행한 성인의 기적은 그레고리우 대교황의 대화체 성인전 제2권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 기적들은 한 결같이 놀라운 것들이지만 12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이끈 탁월한 지도력도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순례자들이 고색창연한 수비야꼬 베네딕또 대수도원을 참배하러 오며 1천5백 년 전의 베네딕또를 재발견하고 그의 정신을 읽는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어디에나 있는 법. 그래서 베네딕또 성인의 명성을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이웃 본당의 주임인 플로렌시오시니부가 그 장본이 이었다. 베네딕또 성인은 그를 피하여 몇몇 제자들과 함께 「로마」에서 남쪽으로 1백50km지점에「몬테 까시오」로 갔다. 그것은 서기5백29년. 그의 나이 50세가량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몬테 까시오」산정에 있었던 이교도의 신전을 헐어 버리고 거기에 수도원을 세웠다. 성인은「몬떼까시노」 수도원에서 수도 규칙을 쓰고 수도 생활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 이를 베네딕또 수도회의 모체가 되게 하였다. 그레고리우 대교 의 대화집에 의하면「몬테 까시오」에서 행한 성인의 기적도 굉장히 많다. 본시 그레고리우 대교황은 역사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교훈을 목적으로 성인전을 기록했기 때문에 성인이 행한 기적에는 한 결같이 연대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그 수많은 기적 중에서 베네딕또의 생애의 역사적 배경을 뚜렷이 해주는 것이다. 고트족의 왕인 또띨라에게 행한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고트족의 또띨라 왕은 베네딕또 성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하를 왕으로 가장시켜 예후를 갖추어 베네딕또 성인을 찾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성인은 그를 보자마자「아들아 왕관과 옷을 벗어라. 네가 입고 있는 것은 네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땅에 쓰러졌고 후에 또띨라왕 자신이 직접 성인을 찾아 왔을 때도 역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땅에 엎드렸다 고한다. 이 사건은 기적으로서는 가장 대수롭지 않는 것이지만 또띨라의「몬뗴 까시논」방문이 서기 5백46년이었으므로 베네딕또 성인이 적어도 그때까지 생존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인 것이다.
성인은 선종하기 6일전에 임종일을 수사들에게 예언하고 그때부터 병상에 들어갔다.
6일째 되던 날 그는 수사들의 부축으로 성당에 가서 성체와 성혈을 하고 양팔을 하늘 높이든 채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서기 5백50년경 3월 21일. 향년70세 가량 되었을 때 이었다.
修道規則書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내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어진 아버지의 춘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멀어졌던 하느님께 순종의 노고로 되돌아 가거라. 』고하는 구절로 시작되는 머리말과 함께 73장으로 엮어진 그의 수도 규칙에는 그때까지 있었던 주도적 이념을 정리 및 수정한 베네딕또의 사상이 실려 있다.
그를 서방 수도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탁월한 수도 규칙서 때문이다. 그는 논리적 사고의 소유자라기보다 실질적 지혜의 소유자였고 그레고리오 대교황이 표현했듯이 「Vip Dei」즉 「하느님의 사람」인 동시에 땅을 딛고 서는 사람으로 현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Realist였다. 그래서 동방 수도자들과는 달리 과도한 엄격을 피하고 수도 규칙을 제정할 때 항상 분별력과 중용 (中唐)을 염두에 두어 모자라거나 지나침이 없도록 했다. 베네딕또의 중용은 이것과 저것을 합해서 나눈 평균이나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알맞게 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Era EU Labors』원즉 『기도 하고 일하라』이것이 베네딕또의 모토이다. 모토는 그의 수도규칙서에 글자 그대로 표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규칙서는 읽고 나면, 수도자는 누구나 『기도하고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부 베네딕또는 특히 기도를 중요시해서 성무일도(Opus Dei)에 관한 것을 규정하는데만, 73장으로 된 규칙서에서 12장이 되는 분량을 할애했고, 근로정신과 형제적 평등사상을 강조하여 인종과 출신 신분의 차별 없이 누구나 일을 하도록 하였다.
인간은 기도하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일만하면 물질 위주의 세상으로 전락하기 쉽다. 신의 의미가 망각되고 비인간화가 가속화되는 현실을 직시할 때, 지난날의 기도의 부재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 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 하며 일하라』고한 그의 모토는 오늘도 수도자들에게 뿐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도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베네딕또가 그의 규칙서에 강조한 것은 아직도 많다. 순명, 겸손, 손님 환대, 아빠스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함께 사는 수도원 공동체의 가족 정신ㆍ수도원에 끝까지 머물며 주님께 봉사하는 자세, 아무것도 그리스도에 선행시킬 수 없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사상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1천5백 년 전에 집필한 그의 규칙서에서 오늘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며 『수도 생활과 신앙에 더욱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없는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라고 한 우리 사부 성 베네딕또의 말씀에 확신을 갖고 있다.
聖人의 후예들
베네딕또 수도원은 「몬테 까시오」를 모체로 하여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외국에 수도원을 설립한 것은 서기5백96년 그레고리우 대교황이 아우구스띠노를 위시하여 40명의 베네딕또 회원을 영국으로 파견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후 베네딕또회는 전 유럽에 퍼져 나가 13세기까지는 수도원이라고 하면 베네딕또 수도원밖에 없었다. 프란치스꼬회ㆍ도미니꼬회ㆍ예수회 등은 모두 13세기 이후에 창립된 수도회인 것이다.
베네딕또의 후예들은 기도와 일로 교회와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자연민족으로 구성된 젊은 유럽은 베네딕또의 후예들에 의해 종교와 분화를 받았다.
그러나 베네딕또는 규칙서를 집필할 때 문화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문화는 결과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기도하고 일하라』고 한 사부의 모토에 따라 그의 후예들은 일을 했다. 그 결과가 젊은 유럽을 크리스천으로 만들었고 문화국으로 육성했다. 그의 후예들은 이교도인 자연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교육했고, 서적을 베끼고, 도서관을 세워 문화를 보전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합리적 농경법을 가르치고, 공예품을 만들고, 성당을 짓고, 수도원 내에서 생산된 것을 팔았다.
한마디로 베네딕또와 그의 후예들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의 유럽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2차 대전 때 미국의 폭격으로 완파되었던 「몬테 까시오」의 베네딕또 대수도원을 원형대로 복구하여 1964년 10월 24일 수도원 성당을 축성할 때 교황 바오로 6세가 베네딕또 성인을 유럽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이때부터 베네딕또 성인은「서양 문화권 수도원의 아버지」라는 칭호 외에 「유럽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또 하나 더 받게 되었다. 베네딕또회의 수도원 설립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고 지역과 시기를 달리하여 전 세계로 퍼져 북미ㆍ남미ㆍ아시아ㆍ아프리카ㆍ호주 전역에 분포되었다. 현재 남자베네딕또수도원은 2백37개. 여자베네딕또수녀회는 8백45개인데 그중 독일어 사용 지역엔 남자 수도회만 하더라도 44개나 된다.
한국에 진출한 3개의 베네딕또회. 즉 부산 올리베따노 베네딕또수녀회와 왜관 베네딕또 대수도원과 대구 포교 성 베네딕또 수녀회도 역시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지역에 설립된 회들이다.
부산 베네딕또 수녀회는 1862년 올리베따노에 의해 설립된 회로 스위스의 「캄」에 모원이 있고, 왜관 베네딕또 수도원과 대구 베네딕또 수녀회는 모두 독일에 모원을 두고 있다. 왜관과 대구의 양 베네딕또회는 같은 창설자인 안드레와 암라인 신부에 의해 독일 「라이헨바흐」에서 남자는 1884년에, 여자는 1885년에 설립되었다. 안드레와 신부는 독일 보이톤 베네딕또 수도회원이었다. 대부분의 베네딕또회가 그러하듯이 보이론 베네딕또 수도원은 관상수도원이다. 안드레아 신부는 시대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호응하여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베네딕또회를 설립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세운 회가 바로 왜관 베네딕또 수도원에 소속된 독일의 쌈터 오틸리엔 수족과 대구 베네딕또 수녀회가 소속된 독일의 투췬 수족인 것이다.
한국에 진출한 이들 3개 베네딕또회는 1천5백년의 전통을 지닌 베네딕또회에서 1백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가장 젊은 가지들이다. 그러나 나무의 생명력은 끝에 붙을수록 왕성하다. 그리고 생명이 왕성할수록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다. 1천5백년의 전통속에서 가장 젊은 한국의 베네딕또 후예들이 그 고유의 전통을 보전하면서 한국 풍토에 맞게 성장하여 한국 교회와 한민족에게 바로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과거 베네딕또의 후예 들이 유럽에 기여했던 것처럼 한국에 있는 그의 후예들은 오늘의 한국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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