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성베네딕또 수도회 왜관 대수도원 원장 지 에른스트 신부가 서원 금경축을 맞아 지난 50년간의 수도 생활을 회고한 내용이다.
50년이란 세월은 한 세기의 반이며. 그리스도 강생하신후 부터의 40분의 1이라는 세월이라 하겠다. 1929년 5월 13일 나는 성 오틸리엔 대수도원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님 앞에서 서원을 했고 5代 대원장님이신 노트껜 볼프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다시 서원을 새롭게 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는 무척이나 얌전한 아이였나 보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단 두 번밖에는 귀싸대기를 맞아 본적이 없었으니까.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너무 오랫동안 웃는다고 웃다가 여선생에게 뺨 맞은 적이 있고 또 한 번은 우리 본당 신부님께서 조용하게 가르치시는 교리 시간에 그만 유리병을 돌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얻어맞은 것이다. 그리고 꼭 한번 남자 선생에게 혼난 적이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여학생의 머리채를 한 움큼 뜯었다가 엉덩이 바지가 팽팽하도록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는데 너무도 분이 나서 책상 밑에까지 기어들어가 손과 발을 동동 구르며 원통해하는 나를 아버지가 와서야 끌어내 달랠 수가 있었다고 형제들이 그러지만 그것은 나에게 기억이 없다.
옥사독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니 신문에서도 내가 어릴때는 짓궂은 장난꾸러기라 했는데 나는 좀처럼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나의 성소는 어떻게 받았던가? 이 문제도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주일날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레고리안 창미사에 갔었는데 그때 기둥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있노라니까 선교사가 되어 흑인들에게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갔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외방 선교회에 가고 싶다는 것을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식불그」고등학교에 계시는 종교 선생님에게 보내 주셨다. 거기에는 보이들의(관상회) 분도 회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성 오틸리엔 수도원으로 소개해 주었다.
공교롭게도 8남매 중에서 막내인 나만이 대학에 가기위해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던 것은 후에 안 일이지만(다른 형제들은 전부 기술 분야로) 나를 그때 혼내 주었던 그 선생님이 아버지께 권유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빌헬름, 돌았는가. 우리가 무슨 돈으로 그 아이의 학비를 후원하겠는가?』그러나 어느 신부님이 『정말 잘 견뎌 내려 하는가?』다짐을 받으신 후에 어느 농장에서 일하는 부인을 나의 은인으로 주선해 주셨던 것이다.
성 오틸리엔 신학교에 입학하던 순간부터 견뎌낼 의지는 내게 넉넉히 있었다. 원래 나는 7년이나 더 먼저 금경축을 지내야 했을 테니까 『어쩌면 그 아이가 또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니 공부 시켜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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