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치스꼬는 1182년 이태리「아싸시」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평소 프란치스꼬는 음악을 좋아하고 파티에 참석하는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프란치스꼬야, 내교회를 재건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값비싼 의복을 벗어던지고 걸인들이 입는 누더기를 걸쳤다. 그는 『머리를 누일곳 조차없는』분, 곧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그후 얼마안가 12명의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다. 당시교황 인노센트3세는 그들의 생활양식을 윤허하기에 이르었으며 이때부터 그의 공동체는 「작은 형제들」혹은 「프란치스꼬회원들」이라는 위대한 수도회의 출범을 고하게 됐다. 오늘날 프란치스꼬수도회는 수천명의 회원들이 세계각지에서 창설자인 프란치스꼬 성인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또한 프란치스꼬는 끌라라란 한여성을 수도회에 입회시켰는데 끌라라역시 성녀가 됐으며「청빈의 끌라라회」를 창설하기도했다.
설교와 구걸의 생활, 그리고 새수도회의 사부로서의 활동의에도 프란치스꼬는 많은 시간을 산중에서 기도하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고 바로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을 자기의 양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받았다. 이 오상은 죽을때까지 계속 남아있었다.
성프란치스꼬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사제되길 한사코 거절하고 부제로만 남아있었다. 그의 끊임없는 기도는 『나의 하느님이여, 나의 전부시여』였다. 1226년 10월 4일 44세로 숨을 거두면서 프란치스꼬는 『자매인 죽음이여 어서 오라』며 선종했다. 성 프란치스꼬의 축일은 10월 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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