終身副祭 도입의 神學的 意味
한국에 있는 우리의 교회는 한국사회의 구원적 변용 즉 분열한 인간상을 인간화하고 분단된 민족상을 통일화하고 화해시키는 일에 헌신하여야 할 민족사적 사명을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소외안에서 또 분단 안에서 생긴 인간들 사이의 사귐을 촉진시키고 인간을 보다 진실한 인간으로 하여 우정과 진리에 사람을 이끄는 사회구조를 형성토록 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이미 하느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 사이에서 역사하시고 계심을 신뢰하는 우리들이기에 복음의 현대적 해석을 통해서 사회에서의 그리스도교적 활동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여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백성은 사회와의 새로운 연대감 특히 인간의 해방과 화해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발견하여야한다. 그런데 그 새로운 형태의 제시를 기혼자의 종신부제직이라는 제도의 도입으로 할수 없을까.
복음은 인류를 결코 교회와 세상이란느 두 부분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와 사회 안에서 역사하시고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이 교회의 체제、개인적 권력、사회적 특권 및 그룹의 우월을 교묘하게 방위하는 따위의 형식을 취해서는 안된다. 인간 생활의 모든면이 복음의 빛에 비추어서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며 더욱 구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에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그의 도움을 약속하셨다고 해서 교회의 제도를 비판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기마련이다.
오늘날의 우리하느님의 백성은 확실히 교회를교회로서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슴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워서 잘 알고있다. 역사는 체험에서 볼 때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하였을 때에 가장 생동하였던 것이다. 물론 오늘도 또 내일에도 그럴것이 틀림없다.
종신부제직은 和解의 직책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에 일채해서 살고 복음에 대하여 보다더 충실한 증거를 하기 우해서는교회는 사회와 귾임없이 대화 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교회가 교회답게되기 위해서는 세상이라는 사회가 필요하기에 말이다. 교회가 대화 협력 경우에 따라서는 긴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의해서만 교회는 자기이해에 도달하여 하느님에의 충실을 회득할수가 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들은 신앙을 갖고우선 민족및 인류전체를 생각하여야 하는 동시에 이민족과 인류가운데에 특별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하느님 백성인 교회를 생각하여야 하겠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회안에서의 그 사명에 의하여 정의되고 세상을 향해서 열력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종신부제야말로 복음의 증명에 충실하고 교회의 전통의 가장 깊은 의향과 일치하여 인간사회앞에 설 수 있는 가장 새로운 인간자세『성직자자세의 표지라고 할수 있을 것같다. 특히 고뇌하고 있는 우리한국 민족과 그 사회의 인간성 앞에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기혼자의 부제직은 화해의 직책、중개의 역할이기에 말이다.
「말씀이 선교」에 注力해야
제2차 「바티깐」공의회는 종래의 성사적 직무에 대한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더욱더 복음적인 사고방식으로 옮겨감으로써 성서운동에 바탕을둔 강론의 쇄신을 수반한 말슴의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거룩한 손에서 거룩한 입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주교의 첫째 임무를 복음의 강론이라고 규정하고(교회헌장25)또 사제의 첫의무는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전하는 것이라 선포함으로써 공의회는 말씀의 선교를 첫째의 위치에 갖다놓았다.
그뿐아니라 『특히 사제가 없는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거룩한 전례가 장려되어야한다. 이런 경우에는 부제나 주교에게서 위임을 받은 사람이 이 말씀의 전례를 지도해야 한다』(전례헌장35)라고 선언하는 가운데 말씀의 선교의 중요성에 비추어서 앞으로 교회가 영속적인 신분인 부제직을 부흥해야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를 분배하는 직무자인 사제는 하느님말씀의 봉사자이다. 오늘날 만큼 하느님의 백성이 사람의 마음에 깊이 파고스며드는 훌륭한 강론을 요구하는 시대도 드물다는것을 인식할수록 더욱 사제가 수행하여야할 말씀의 선교는 중요성을 띠게 마련이다. 특히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말씀의 선교가 지니고있는 예언적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말할나위없이 긴요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강론 통해 새 미래 창조케
교회의 강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역사적 상황속에 새로운 미래를 가져오게 하기위한것이 되지않으면 안된다. 강론이 실재와 무관할때 진절머리가 나게되고 또 역사속에 미래의 기쁨을 가져오지 못할때 진부한 것이 되기마련이다. 만일 강론이 역사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이 행위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물에대한 관심、새 사회에 대한 희망. 그리고 새 인간성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관심의 분위기를 창조해낼 것이다.
복음적인 강론은 세계변혁의 요청으로 곧 미래의 새로운 실재속으로 변형되어 갈 것을 요구하는 말로 들리것이며 살아있는 말씀은 삶의 미래를 이미 열어놓고 가까이 느낄수있게하는 것이다.
기실 구원의 주된 방법은 성사이지만 강론도 초자연적 효과가 있다는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느 안된다. 왜냐하면 강론이야말로 성사의 활동성을 완성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강론을 교회에 있어 본질적인 의무이다. 강론없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일컬을수가 없는것이다.
제2차「바티깐」공의회는 전례헌장 35장에서「강론은 구원의 역사속에서 즉 그리스도의 신비에 있어 하느님의 기묘한 업적들을 선포하는 것이기때문에 강론의 직책은 가장 성실하고 정확하게 수행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있다. 또한 강론을 전례 자체의 한부분으로서 적극 권장하고 중대한 이유없이 주일이나 파공축일에 강본이 생략되어서 안된다고 (전례헌장52)강조하고있다.
그러나 최근까지의 경향을 볼때 다른 성무에 너무 바쁜나머지 사제가 강론을 결코 경시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는것 같지않다. 실제로 주교나 사제들은 교회관리나 성사적 활동이나 기타 제반사정으로 너무나 많은 일들을 취급하고 있기때문에 복음적인 강론의 준비를 위한 충부한 연구、끊임없는 신학적 공부를 계속할 시간이 부족한 형편에 처해있다.
그럼로 사제들이 복음적인 강론을 위해 사목적인 難事에서 손을 떼고 많은 시간을 기도 신학적 연구 현대사회의 요구의 식별을 통한 강론준비에 바칠 수 있는 사목적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참으로 긴급한 것이다. 그뿐아니라 사제가 예비자교리나 다른 말씀의 선교에 전념할 수 있게 사목활동을 조절하는것도 시급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오로 이래 신앙은 들어야 시작할 수 있기에(로마10ㆍ17참조)모든 사람에게 모든 말이 아니라 각 사람마다에게 합당한 말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임상적인 진찰에 따라서 투약하듯이 사제도 강론에 있어 그와같은 사목적인 배려를 꼭 하여야 할 것이다. 사제이 강론이 듣는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반적 추상적으로 말할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초점을 맞추어서 행해져야 할것이다. 만일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사제에게서 설득력있는 강론을 기대할 수 없을뿐더러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공염불이 될때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참으로 그만큼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제들이 앞서 말한 바 있는 교회관리나 다른 많은 활동에 얽매어 첫째가는 「말씀의 선교」의 직무에 충실할 수 없다면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필코 사제들은 그러한 일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사제들이 말씀의 선교에으 해방을 성취하는 문제에서 당연히 종신부제직의 도입을 고려하지 않을수가 없다. 물론 강론에 대한 신도들의 요망과 사제의 본질을 묻는 사목적 신학적 상황에서도 종신부제직의 부흥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12사도의 7명의 보조자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사도시대의 교회체험을 어떻게 참고로 하느냐가 현대교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시된다. 신약성서를 볼것 같으면 초대교회에서 복잡한 발전을 거쳐서 서서히 부제직을 제도화하고 조직화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희랍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이 개종시에서도 예루살렘에、후에는 다른 여러도시에서도 공동체에 스며들게 됨에 따라서 사회 각층의 사람을 보살피는 낮은지위의 직무가 필요하게됐다. 그리하여 집사라고 불리우는 하위의 직무가 늘어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실 사도행전에는 한번도 부제라는 날말이 나타나지않으나 실제로는 사도들이 선출하여 안수한 일곱명은 부제라고 불리웠던것이다. 그뿐아니라 사도행전、사목서간및 초기 신자가 남긴 문서에는 선임을 받은 남녀가 신도들을 위하여 화해의 일을 하고 있었음이 기록되고 있다.
어떻든간에 사도행전에 기록돼있는 12사도가 일곱보조자를 선임한 배경과 과정이 갖는 그 신학적 의미는 오늘날의 종신부제직 도입에 결정적인 무엇을 주는 것이다.
이무렵 신도들의 수효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그레샤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본토 유대인들에 대해서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과부들이 무시를 당하여 날마다의 식량배급을 제대로 받지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 두 사도가 신도들을 모두 불러놓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제쳐놓고 살림살이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차고 여러분에게 신앙을 받는 사람 일곱을 뽑아내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오직 기도하는일과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읍니다. 모든 신도들은 이말에 찬동하여 믿음과 성령으로 가득찬 일곱사람을 뽑아 사도들 앞에 내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사도행전6ㆍ1-6)는 이 기사는 오늘의 한국교회공동체가 처해 있는사목적 선교적 상황을 예시하고 이쓴 것이다.
使徒時代와 비슷한 한국교회
12인의 사도가 모든 공동체에 하느님의 말슴을 선교하는 책무에 지장을 가져오는 일에서 손떼기 위하여 사람들의 찬동을 얻어 보조자를 선출하였듯이 우리들의 교회공동체도 주교나 사제들이 말씀의 선교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부제직의 부흥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종신부제야말로 교회가 임명한 직무자로서 교회와 인류를 중개하는 직무자이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여러가지 활동과 일에서 사제를 해방시킬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사실 종신부제는 사제를 활동으로부터 해방켜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로이 활발케하며 말씀이 하느님의 백성을 화해의 공동체로서 육성케한다. 더우기 종시부제는 화해의 종개직으로 사제의 효과적인 강론을 통해서 사제를 비롯한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이 미사성제에서 사회의 구원에로 뛰어나가게 끔 할것이다.
종시부제가 유효한 곳에서는 그가 교구나 본당의 관리를 할 수도 있음으로 복음적 설교와 말씀의 설교를 위해 사제들을 교회관리나 기타 잡다한 활동에서 해방신킬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세계에 있어서 사제들의 말씀의 봉사를 위하여 특히 강론을 위하여 종신부제직이야마롤 참으로 긴요하기 짝이 없는 제도라고 할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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