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크리스찬 축일중 가장 큰 축일인 부활절에 대한 환희와 용약힘이 초세기부터 성인들과 교부들의 저서안에서 명화하게 나타나고 있다.
「모든 대축일의 여왕」으로 언급되는 이 부활 축일을「니시안」의 성그레고리오(390)는『별가운데 태양처럼 시민적 휴일로 뿐아니라 주님의 다른 축일을 능가하는 최상의 축일이며 축제』라고 기록했다.
교회력의 중심인 이 부활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묻히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기원은 그리스도교의 초상기까지 올라가며 그리스도의「다시 살아남」에 관해 주간적 기념으로 간주된 일요일이 따라나온 예전중에서 가장 오래된 예전에 속하고 있다고 본다.
「이스터」라는 영어 이름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8세기경 베다는 앵글로색슨의 봄의 여신(女神) 에오스트레의 이름에서 이 말을 빼내고 있다.
서방에서는 춘분(3월 21일 ·22일경)이 지난 滿月후의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내고 있다. 그런대 만월이 일요일에 있게되면 부활절은 그다음 주일이 된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3월 22일과 4월 25일 사이에 있게 된다. 이 규정은 8세기까지 게속 많은 논쟁을 통해 미확정돼 오다가 확정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유다인들이 태음월(太陰月)에 기초한 달력(月曆)을 준수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그리스찬 빠스카인 부활절이 잇따르게 된 유다적 빠스카를 유다의달 니산(Nisan) 14일에 거행했다. 따라서 주간의 어떤날에 묶여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논쟁이된 것은 크리스찬들이 이 축일을 평일에 거행하느냐 아니면 다음 일요일에 거행 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에우세비오(4세기)는 그의 교회사에서 다음과 같이 토론을 전개하고 있다.『전 아시아(로마령)의 크리스찬 공동체들은 오랜 전통을 따라 구세주의 빠스카는 유다인들이 고양(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도록 명려받은 그달 14일에 매년 계속돼야하며 따라서 이것이 오는 그 주간의 모든 날에는 재를 지키던 것을 끝내는 것이 본질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외 모든 교회들은 이러한 실천을 준행하지 못했다. 그들 교회들은 사도적전승에 의해 이때에 와서 관습을 따랐으며 다른날에는 재게를 끝내는 것은 옳지 않고 구세주가 다시 살아나신 날에 끝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이때에 열린 주교 시노드와 공의회는 모든 부분에 걸쳐 그들을 위한 교회의 칙령을 내렸다. 그들은 죽음으로부터의 주님부활의 신비는 다른 날이 아닌 일에 거행해야 하고 이날에만 빠스카 재게의 끝을 준행해야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니산 14일에 이스터(Easter·부활제)를 지키는 사람들을 가르켜「과르또데치만스」(Quartadecinens)라고 했다. 그들중 한사람으로서 2세기 에페소의 주교 뽈리끄라떼스(Polycrstes)는 설명하기를『니산 14일을 부활제로 준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관십을 고수하기 위해 성요한이 실천했다』고 하여 지방적 전승에 호소했던 것이다.
2세기 후반에 교황 빅또리노(Victor)는 아시아를 단죄했다.
그러나 부활절을 니산 14일에 준수했던「과르또덴치만스」들의 실천은 그곳에서 수세기동안 계속되었다.
아시아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다른 교회들은 그의 부활하심을 기념하였다는 제안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세기에는 크리스찬들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함께 구원의 두기지 같은 신비 축면으로 기념했다.
4세기말에 이르러 세족레 목요일(Maundy Fhureday′ 성목요일=성체대레=최후만찬 목요일)과 성금요일(Good Friday′ 수난일=애도의 성금요일=수난대제일=부활전 전금요일) 그리고 부활절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이때에「예루살렘」에서 성 목요일 성금요일 부활제를 지킨 증거가 에테리아(Ethera)의 예루살렘 순방기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부활절 날짜에 관해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는 그 축제의 일요일 거행을 받아들이되 어떤 일요일에 거행하느냐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교회의 일치성을 이룩하려는 문제였던 것이 기도하다. 그 난제가 일어나게된 까닭은 어떤교회에서는 완전치 못한 유다의 달력을 따라 유다적 빠스카에 실제 거행하였기 때문이다. 유다 달력은 태음력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11일이 짧음)이 계산에 의하면 부활제가 가끔은 춘분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니산 14일은 춘분 다음 유다의 첫째달 만월이다) 다른 교회들은 그들의 고유한 과학적 방법에 의해 성서적 날짜(춘분 다음만월)를 정하였다. 로마에서는 씨저 이래 춘분이 3월 25일로 고정됐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천문학상의 이유로 3월 21일을 춘분으로 정했다. 니케아 공의회는 이 알렉산드리아의 3월 21일을 춘분으로 정한 계산법을 적용, 분이 지난 만월 다음에 오는 첫번째 일요일을 부활주일로 정했던것이다.
그 날짜는 율리오력(Julian Calendar) 안에 확실한 날짜이다.
4~5세기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계산방법의 상위함이 다시 난제의 원인을 유발했으나 관례적인 절충에 의해 정해졌다. 챨마네때까지 갈리아에서는 현저한 불확실성이 존재했다. 457년 로마네서 만든 빠스카 알람표(주기표)에 432년 주기로 적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일람표는 로마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와 갈라아와 차이성이 나타나게 됐다.
켈트족(인도 유럽인종의 한갈래) 교회들은 그들 고유의 계산법에 따랐다. 그들의 게산법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나름의 계산법을 상용했던 것이다. 그들은은 흔이 말하는 과르또데치만스들 아니었다. 아우구스띠노스(597) 영향하에 로마로부터 산교사들이 남부 영국에 도착하자 부활제의 날짜에 관한 논쟁이 양파간에 일어났다. 이 문제는 위트바이(잉글랜드 동북부 요크셔州의 항구도시 옛수도원의 유적이 있음) 시노드(664 혹은 663)를 통해 노룸브리아(Nonthumbrie′ 영국 앵글로색슨 시대의 옛 왕국)에서 로마적 계산법이 적용, 확정되었으며 이 계산법는 또 영국 캔터베리 테오드로 대주교에 의해 영국전역에 준수 되도록 했다. (699)
오늘날의 부활제는 위에서 언급된 규칙에 따라 서방의 전 크리스찬들이 지키고 있다. 동방교회의 부활제는 간혹 서방교회의 부활제와 일치할 때도 있지만 일주간 4주혹은 5주간후에 올 수 있기 때문에 서방교회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계산법을 따르고 있다.
4월 첫주일을 고정 부활절로 하고 매분기 첫날을 일요일에다 두자는 달력 개편이 모든 체계에서 제시돼 오고있다. 이 제안에 대해 몇몇 교회의 성직자 혹은 신자들이 저지를 보이고 있지만 신학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제안은 여러 교회들간의 합치되는 의견 일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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