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강연회가 「문학과 구원」을 대주제로 지난 4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명동성당 사도회관에서 5차에 걸쳐 얼렸다. 차제에 본보는 조선교구 설정 1백50주 기념 문학강연회의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사람이 주요 관심과 주의를 이승으로 돌리고 非宗敎的인 원리에 따라서 사회를 편성하고 조성하는 이른바 世俗化 과정이 진척되기 이전、종교와 文學은 그목적과 역할과 기능에 있어 교차되는 점이 많았다.
종교가 現世에서의 행동에 대한 거역할 길없는 규범이 되고 명령이 되었을때 문학은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을 통해 그 범례를 보여주었다. 흔히들 성서의 문학성이니 불경의 문학성이니하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대체로 학규범에 대한 범례적인 구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종교가 펼쳐보이는 세계와 우주의 설명은 「자리바꿈한 신화」로서의 문학속에 고스란히 반복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와 문학이 공유하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세계의 고난과 비참과 행복에 대한이해와 설명의 기도이다. 세계에 미안해 있는 고난과 악의 존재를 어떻게 자비롭고 전능한 신의 개념과 화해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령 「읍기」에서 고전적 표현을 얻고 있지만 이것은 문학의 執念的인 탐구의대상이 되어왔다. 그리스의 고전 비극이래 비극은 정의와 보상이 없는 비극 고유의 비극적 공간에서 삶의 고난과 비참에 대한 연민과 공포의 실상을 추구해 왔다. 비극이 「세속화」현상이 팽창하기 이전까지 최상의 문학장르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근대사회에서 세속화가 착실하게 진행되고 「마법으로부터의 세계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초월의 공간과 함께 비극의 공간도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역도 현저하게 좁아지기 시작한다. 「필연성에 대처할 갑옷은 없다」고 옛 비극시인은 운명앞에서의 인간의 무력을 실토했지만 필연성이란 이해되지 못할 때에 한해서 맹목적인 것이라는게 근대인의 생각이다. 이에 따라서 근대세계에 있어서 비극적인 주인공을 쓰러뜨리고 부수는 것은 초인적 능력을 지닌 운명이 아니라 환경이거나 성격이거나 억압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 제도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비극 대신 심각한 주제의 문제극이 등장하게 되고 「신에게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인 소설이 의기양양한 기세로 퍼지게 된다.
세속화와 함께 초월적 공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죽음을 다툴때이다. 그이전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장엄한劇은 영원이라는 무대위에서 엄숙한 것으로 정의된 채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이었고 來世에의 문턱이었다. 이승에서의 짤막한 居住 동안에 이룩한 도덕적 선택의 결과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통하는 실존적인 갈림길이었다. 그러나 초원의 차원이 사라진 세속의 공간에서 죽음은 이제 단순한 삶의 종식을 뜻하는 「죽어 가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죽음의 공간은 이제 순화된 공간이 아니다. 가령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의 공간은 후줄구레한 일상적인 잡동사니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헤밍웨이는 싸움터에서의 병사들의 죽음과 도수장에서의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한다.
세속화된 근대문학에서 초월적 공간과 비극의 공간을 대체하고 있는것은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과 의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 있어서의 이성의 기능확대로서 地上에서의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믿고 있고 거기서 개인의 고양된 역할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음지에서 세계는 장미빛만을 띠고 있지는 않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시대는 바로 文明의 한복판에서 끔직한 야만주의가 전례없는 규모로 판을 쳤던 시기이기도 하다.
神앞에서의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의 방자한 오만이 人間侮蔑을 극치로 몰고간 사례의 끔찍함을 우리는 가령 유대인 학살에서 생생히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야만주의의 원천이 「씨니씨즘」이라고 할 때 종교야말로 씨니씨즘 극복을 위한 久遠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이름으로 신을 거부했던 인문주의가 제대로 자기소임을 다하지 못했을때、그것은 씨니씨즘과 이에기초한 조직적 폭력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생각해볼때、우리 시대에 있어 문학과 종교가 맡은 소임이 크게 다른것은 아니다. 사실을 인간의 위엄에 맞도록하고 말을 사실에 맞도록 한다는 큰 목적을 문학과 종교는 공유하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