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와서 문학은「아름다움의 창조」라든가「감동」을 목표하는데서 넘어섰다. 문학은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와 인간과 세계의 自己完成을 위한 과제 및 체험을 표현하기를 요청받는다.
이사명이 큰 테두리를 잡아 구체화할때 세계관의 문제에 진출한다. 이 문제에 자취를 보여주기도 했다.
西歐에서 한때 발레리는「知性」을 신봉함으로써 세계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앙드레지드도 지식계급 연맹에 앞장을 섰으나 목적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무렵 일제하 한국 문단에서는 식민지 상황이란 전제도 잊은채 金起林ㆍ崔載瑞 등이 모더니즘과 주지주의를 표방, 문명의 장래를 한때 낙관했다가 反歷史性을 반선한 일도 있다.
2차대전 후에는 사르트르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해 운명의 선택, 책임과 저항 등으로 현대의 위기에 대결했으나 그 노력이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지는 못했다.
근래에는 70년대에 한국문단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구조주의가 서구에서 할기를 띠었는데, 초역사적 기호체계로서의 언어관, 전문화에로의 지나친 치우침이 비판을 받고있다. 『현대의 분석주의 인문학이 인간전체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종교계로 부터의 지적이다.
이제는 문학에 있어서 종합과 창조의 세계관이 새로이 모색될만 하다고 보인다.
종합에는 산재하는 것들 사이를 관통하거나 넘어서는 초월적 능력이 필요하다.
문학은 언제 어디서나 늘 말할 수 있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 문학의 수단은「언어」인데, 이때의 언어는 기계적 차원에 전탁한 언어아니고 칼 라너가 말하는「원초적언어」이다. 이런 언어는 사고와 기호 이상의 것이며 직감과 초월형 이상학과 역사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예술은 항상 예술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예술이 심미적 가치한계내에 머문다면 그것은 인간실존의 공통에 대한 마취제에 불과하게 된다. 문학예술의 언어는 구원을 향한 역사성을 띠고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언어는 마음속에서 누를 수 없이 솟구치며, 사람들을 사로잡으며, 사물과 세계가 머물러 있기 싫어하는 어둠으로부터 그것을 인간적인 빛속으로 끌어낸다. 국토의 분단선도 끌어내고, 경직된 사고의 불행들도 끌어내는 발설을 문학이 할 수 있다. 언어로서만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실현시켜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문학의 언어, 원초적 언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언어로만 움직이게 한다면 세계의 구원이 언제 이루어 지겠는가.
현대 良識의 철학자 보헨스키는 말하기를『오직 이해하기만 하려는 이론철학으로 부터 진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실천 철학에 이르는데에 인간생활의 중심이 있고 진리가 있다』고했다. 불교에서도 실은 미자각적 凡夫, 개인주의적 유심론자 羅漢을 지양하여 사회적자각과 중생제도로서의 보살도에 이르는것을 완성의 단계로 보고있다.
이렇게 볼때 다시 세계관의 문제가 구체화 된다. 지난날「지성」신봉의 세계관은 실제로 문제해결에다가 가지 못했으며, 오히려 양차대전의 죄악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지금도 3차 대전에의 우려와 함께 여러차례의 국지전이 인간들의 삶의 자리를 참혹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항에서 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세계의구원을 목표하는 한종교세계가 펼치는 오늘의 세계관을 보기로 하자.
물질주의, 초절적 인간가치의 부정,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유물론적의 세계권이 있다.
경제 운영의 동기가 이윤에만 있는듯, 법칙이 자유경쟁에만 있는 듯, 사유권에는 의무가 없는 듯, 금전의 국제주의로 인류 형제간의 싸움에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 내부의 못소를 정직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바오로 6세「민족들의 발전촉진」)관료사회주의, 기술자 자본주의 권력 민주주의가 이 시대의 문제이며 민주주의 사회형태는 계속 탐구되어야 한다.
모든 국민의 참여가 필요하며, 참여는 책임의 분담을 뜻한다.
이른바 경제적 후진지역의 민족국가들 안에 오히려 잘 남아있는「인간 가치에 대한 생생한 인식」을 장차 세계 문명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서 제 3세계 민족문화의 정신사적 당위성이 성원을 받게된다. 이와같은 陽明한 세계관은「진리에 대한 사랑」은 이유로 제한없는 대화를 강조한다. 모든 분단 상황사이의 대화에서 구원으로 향하는 원초적언어가 쓰이도록 할 사명이 문학에 지워져 있다.
그리고 노력의 끝에 가서는 허무주의나 개인주의에 관계없이 초절한 인간가치가 상기될 필요도 있다. 『그사람이 무엇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아무것도 없는것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도 있다』이럴수 있는 것이 인간인것도 사실이다. 구원의 희망은 등대처럼 멀리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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