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者없이 평신도의 손으로 세워진 한국가톨릭교회는 1831년 9월 9일 조선교구의 설립을 보았다. 「北京」교구에 소속돼있던 조선교회가 독립적 교구로 설정되는 기쁨을 맛보기까지는 丁夏祥과 劉進吉의 헌신적인 노력이 크게 작용했음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조선교구설정 1백50주를 맞아 본사는 이원순 교수(서울大)를 통해 교구설정의 주역을 맡았던 정하상과 유진길을 중심으로한 조전교구사를 4차례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특히 교회파견 선교사들이 어느날이고 마침내 조선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 사는 교유들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고 주의 포도발의 그쪽 부분을 포교와 성사 집행으로 가꾸게될 수 있으리라는 회망이 적지아니 비치고, 위에 말한 지방의 주민들이 중국의 다른 지방과 연락을 취하기가 아주 드물고 또한 심히 어려우니, 본인은 포교를 주관하는 로마 성교회의 공경하을 추기경 형제들의 권고도 지금 당장 조선나라를 새로운 교구로 설정하고, 거기에「팍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교구장을 세우는것이 적당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자신하여, 그리고 확실한 지식과 고려 끝에 교황의 충만한 직권을 가지고 이교서로써 조선왕국을 지금 당장 새교구로 설정하는 바이며, 이 교구에「북경」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교구장을 세울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상은 1831년 9월 9일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교구의 설정을 선포할때 발표한 교서의 일부이다. 이교서로써 교회 창설 48년만에 조선왕국은 敎政상 조선교구로 독립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가「北京」주교관할하에서 조선왕국을 분리시켜 교구를 설정하고 교황을 대리하는 司牧權者인 교구장을 임명하게 된 것은 첫째 조선은 크리스트적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땅이고, 둘째로 중국과 연락하기 곤란하여 신앙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땅이기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사정이 오늘날처럼 알려져 있지 못한 그 당시에, 8만여리 밖 異城의 聖都에 계시면서 조선교회와 조선왕국의 사정을 이처럼 정확하게 인식하였음은 실로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한 사람의 성직자 조차 없어 미사聖祭도 거행되지 못하고 있는 시련의 교회를 독립한 교구로 설정케한 영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레교리오 16세로 하여금 이러한 認議과英斷를 내리게 한 계기의 조성은 聖都「로마」에게 8만여리 떨어져 있는 동방 조선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의 헌신적 활동과 세계적 經綸에 의해 主導者는 곧 丁夏祥바오로와 劉進吉 아우구스띠노였다. 1816부터 15년간을 두고 계속적으로 엄중한 쇄국의 國蔡을 어겨가며, 어느대 정체가 탄로날지 모르는 奴僕의 행장으로 엄동설한지의 왕복5천리 燕行路를 마다하지 않고 해마다 北京에 드나들기를 이웃집 다니듯했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北京主敎에 간청하였고, 魂膽을 나누며雄圓를 꾸밀 국제적안목과 수완을 지닌 동지 劉進吉을 구하였고, 그와더불어 조선교회 발전의 세계대책을 설계하여 마침내 가톨릭교회 최고수위권자인 로마교황에 직접 호소하였으며, 그 호소와 청원이 로마교황청 고위 성직자의 감동을 자아내게 하여 교황의 특별한 배려를 일어 朝蘚敎區 설정의 결정을 보았다.
『저희들은 敎皇聖下께 두가지일을 겸손되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나이다. 이 두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옵니다…神父를 파견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큰 은혜요 저희들에게는 크나큰 기쁨이 되리라는것은 틀림없는 일이오나, 이오 동시에 저희들의 욕구들 영속적으로 채원주고 잠래에 있어서 저희들의 후손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보장하여 줄 方法이 강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일일 것입니다.』이처럼 현명하게도 丁夏祥과 劉進吉은 1825년을 전후하여 교황에게 성직자의 朝鮮派送만이 아니라 후소들에게 영신적 구원을 영속적으로 보장해 줄 궁극적 대책을 청원했던 것이다.
이 청원은 일지기 初期朝鮮敎會가 假聖聯組繕에 의한 聖事집행이 오류임을 알게된 후 그 조직을 해체하고「北京」주교에게 조선교회를 위한 성직자의 파송을 거듭 청원하여 周文謨신부를 맞이해 들일 수 있었던 1次的 聖聯者迎入運動이나, 周文謨신부가 辛四敎離때 순교한 후목자 잃은 羊떼의 무리가 된 조선교회에서 1811년 權기인 요한 등 8인共同連署록「北京」主敎와 로마교황에게 올린 성직자 파송 청원으로 재개되었던 2차적 聖聯者迎入運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정하상과劉 進吉의 1825년 전후의 로마교황에 대한 청원은 조선교회를 위한 성직자 파송만이 아니라 조선교회에 대한 영속적敎政政策을 요구하고 있는 점에서 姑息的措惺가 아니라 근원적 대책의 강구를 요청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다 발전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간절한 청원이었고 처절한 요구였다고 이해된다.
丁夏祥과 劉進吉에 의하여 작성된 이청원서는 「北京」主敎의손을 거쳐 마카오(Macao)主在布敎聖省經理部長움삐에레스(Umpierres)신부에 전교도었고 그곳에서 라떤로 번역되어 로마 교황성으로 발송되어 1827년 布敎聖省에 접수되었다. 漠文原에서 란띤語諱의 일을 주선하였던 마카오의 움삐에레스 신부는 조선신자들의 이놀라운 제안을 담은청원 서한을 로마로 발송하면서『조선이 필요로 하는것은 조선을 맡아볼 수도회입니다』라고 조선교인들의 청원을 바르게 지적 봉충하여 통보하였고, 나아가 조선을 「北京」교구에서 분리하는 것이 바람직 한일이고, 예수회원을代牧(敎皇代理敎區長)으로 임명하는 일도 생각해봄직 하다고 시사하는 자신의 서한을 같이 포교성성으로 발송하였던 것이다.
현지 지도적 교인의 간절한 청원과 적절한제의, 이것을 뒷받침 해주는 표교성성 동양관계자의 시사와후원동이 마침내 포교성성고위성직자들의 갈등을 자아냈다. 포교성성은 조선황국을「北京」주교의 관할하에서 분리시켜 독립된 교구를 설정하여 조선교회를 적극적을 육성할 필요를 지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극과 시련에 가득찰 쇄국조선의 박해 사회에서의 博敎 활동을 빠리외방 전교회가 담당해 주도록 교섭하게 되었다. 이문제에 대한 회원들의 의견청취를 위해 외방전교회 본부가 동양각지서 활동주이던 長上들에게 발송한 서한에 호응하여『牧者가 없기때문에 영원히 소멸될 위험을 시시 각각으로 당하고 있는 저布敎地… 이런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읍니까. 제가 하겠읍니다』고 브퓌기에르 주교가 朝鮮博道를 자원하고나서 마침내 교황의 조선교구 설정, 브튀기에르 주교의 조선교구 委任의英斷이 1831년 9월 9일에 내려졌던 것이다.
조선교구 설정의 최후 결정은 교황께서 내리신 것이다. 그러한 聖斷이 내릴 수 있는 기본 계기의 조성은 丁夏祥과劉進吉 등 조선교회의 平信徒指導者들에 의한 것이였고, 그것이 실현되기에는 움삐에레스神父, 브튀기에르主敎와 포교성성 고위성직자들의 뒷받침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장기간에 걸친 學問 연구로의 自律的인 天主信仰의 도달, 博敎者의 영도없이 전통사회인에 의한 천주교회의 創設등 世界史에 類例없는한국천주교회의 자랑은 교구창설의역사에서도 피어났던 것이다. 丁夏祥바오로와 劉進吉아우구스띠노는이점에서 조선교구창설을 주도한幕俊의 주역들로 기억 되어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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