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도가 압도적인 폴란드가 공산당에 의해 강제로 무신론 국가로 선포된지 어언 40년 -. 그동안 격동기 폴란드 가톨릭 교회의 중심적인 지도자이자 전 신도의 살아있는 영신의 아버지였던 비진스키 추기경이 지난 5월 28일 79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차제에 본보는 평생을 교회와 조국 폴란드와 성모마리아를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쳐왔던 故 비진스키 추기경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편집자注>
비진스키 추기경은 가톨릭 신도가 압도적인 폴란드가 공산당에 의해 정식으로 무신론 국가로 선포된 세계 제2차 대전이후 격동기 폴란드 가톨릭 교회의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1948년「바르샤바」와「그니에즈노」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부터 그는 폴란드교회 수좌이며 볼 수 있는 으뜸이 됐다.
비진스키 추기경의 가장 최근의 주요역할은 정부와 자유노조간의 비공식적인 중재자역이었다.
금년들어 폴란드를 혼란으로 들끓게 하고 이에 따라 소련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대한 염려까지도 낳게했던 수차의 파업기간동안 비진스키 추기경은 중심적이고 때로는 열띤 논쟁을 벌이는 역할을 맡았다.
1980년 8월 17일「밤비에르지케」에 있는 마리아 대성전에서의 전례집전 중 그는 경제적 긴축을 요청하면서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파업 노동자들의 권리를 응호했다.
그는『노동은 그 보수를 받을 만한 값진 것』이며『소가 곡식을 밟아 탈곡하는 동안에는 재갈을 물리지 못할것』이라는 성경말씀을 인용, 『우리 조국이 말할 수 없는 시련과 불안에 가득차 있는 이런때에 어느 누구도 국가와 우리의 가족 그리고 노동계등에 위협을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국가에 지워진 권리들』을 추구하는 노동계에 대한 그의 언급은 파업자들의 목적을 간접지원하는 것으로 풀이됐다. 그 권리들은 인상된 주식비를 보완하기 위한 보다 높은 임금과 독립노조의 인정, 출판물과 발표의 자유 및 교회가 매스미디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어쨌든 비진스키 추기경은 내핍생활을 요청하면서 폴란드인들에게『폴란드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건설이 추진중인 나라』임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9일이 지나 성모축일에「체스토쵸바」의 성모마리아 대성전에서 행한 그의 강론은 거의 그대로 폴란드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됐으며 알려진 바로는 수많은 파업노동자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자아내게 했다고 전한다.
이날 강론을 통해 비진스키 추기경은 노동자들이 신중하고 분별력있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면서 과도한 요구는 하지말도록 권고했다. 그는파업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즉시 중단할 것을 말하지 않고 대신 열심히 일해야할 필요성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그는 열심한 노동이야말로 파업노동자들이 요구한 여러권리들을 보장받는 필수조건이며 조국을 위한 모든 국민의 책임이라고 천명했다.
이틀후인 8월 28일「체스토쵸바」에서 가진 폴란드 주교회의에서 주교들은 성명을 발표, 국영미디어가 비진스키 추기경의 강론내용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비난했다.이 성명과 별도의 성명에서 주교들은 또 폴란드 국내 질서와 평화유지를 촉구하면서『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조건은 모든 국가의 신성한 제권리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들 권리는 발표의 자유를 비롯 토지와 농토의 개인소유권ㆍ시민들의 독립노동기구나 자체운영체 설립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고 주교들은 지적했다.
10월 22일 비진스키 추기경은 자유노조의 등록을 둘러싼 새로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으로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인 스타니슬라우 카니아와 만났다.
노조측은 그정관에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수락한다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기하는 것을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측은 그 같은 조항을 명시하지 않을 경우 노조등록을 허용치 않을 것임을 고집했다.
다음날 비진스키 추기경은「로마」로 가 과거「크라코프」의 대교구장으로 자신의 부하이기도 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바티깐」에서 만나 폴란드 상황을 토의했다.
그후 소련이 폴란드에 군사개입을 고려중이라는 풍문이 한창 나돌고 있던 12월 빠리일간지「르피가로」와 가진 인터뷰에서 비진스키 추기경은 각국 정부들이 폴란드 국내문제에 관여치말 것을 정중히 경고했다.
2~3주후에 발표한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그는 폴란드 국민이『무기로 무장된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대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무장된 평화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요청했다.
금년 1월 5일 비진스키 추기경은 자유노조 지도자인 레흐 발레사와 개별적으로 만났다. 두사람은 독립노조운동에 가담하려는 농민들의 노력을 포함한 현재의 폴란드 노동상황과 1월에 예정된 발레사의 교황 방문계획 등을 토의 했을것이라는게 소식통들의 보도였다. 그 다음날 주의 공현대축일에 비진스키 추기경은 폴란드인들이 열심히 일할것을 거듭 요청하면서 자국민들의 인권을 부인하는 정부들을 비판했다.
비진스키 추기경의 재능의 한단면은 나중에 최초로 폴란드인 교황이 된 당시 보이티야 추기경도 참석한 이태리「밀란」에서 추기경들과 가진 대담에서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보이티야 추기경은『이태리 추기경님들 중 스키를 할수 있는 분은 몇 %나 됩니까?』고 물었다. 이태리 추기경들은 아무도 스키할 줄 모른다는 말을 들은 보이티야 경은『그것 참 안됐군요. 폴란드 추기경들은 40%가 스키를 할 수 있읍니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이태리 동료 추기경이『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고 묻자 보이티야경은『폴란드에는 추기경이 오직 2명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비진스키 추기경님은 60%로 보고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고 한다. 이들 두 폴란드인들 간의 남다른 애정은 1978년 10월 22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있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취임식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이자리에서 비진스키 추기경은 정상적인 전례순서를 깨고 추기경들 중 두번째로 새교황에게 순명을 서약하게됐다. 이때 추기경이 앞으로 나아가자 교황은 일어섰으며 그리고 비진스키 추기경이 무릎을 꿇자 교황도 역시 무릎을 꿇어 비진스키경을 뜨겁게 포옹했다.
1979년 6월 교황으로서 조국 폴란드에 금의환향해「체스토쵸바」에서 행한 강론중 교항은 비진스키 추기경을 폴란드교회의 추진력이라고 치하했다.
비진스키 추기경은 일평생동안 세가지점에 충성을 다바쳤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와 조국 폴란드 그리고「체스토쵸바」의 성모님께 대한 충성이었다.
그가 늘 폴란드교회의 수좌로 불림을 받은대로 비진스키 추기경은「바르샤바」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미오도바」17번가 저택에서 살아왔다. 이거리는 2차대전 당시 완전히 파괴됐다가 후에 재건됐다.
바로 이저택에서 작은시골 오르간 주자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몇몇 읍서버들이 어느나라 교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추측하는 가톨릭 교회인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비진스키 추기경은 종신토록 폴란드 주교회의 의장이었다. 폴란드 주교회의는 다른 어느 주교회의 보다도 잦게 매년 6회씩 회의를 열고있다. 이 폴란드교회 수좌의 사전 동의없이 폴란드의 주교를 임명하지 않는 것이「바티깐」의 정책이었다.
비진스키 추기경의 개인적인 영향력과 그의 뛰어난 인품에 대한 존경은 공산치하의 동유럽 여타 국가들에서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반면 폴란드에서 교회가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는 중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폴란드 교회 지도자들은 비진스키 추기경이 드러낸 이미지는 강력한 국수주의적인 뉘앙스를 풍긴다고 언급했다.
한 폴란드 신학교 교수는『수세기동안 왕이 공석일때 교회수좌가 국가를 통치해왔는데 우리는 흔히 비진스키경이 이 임시왕의 개념을 여전히 믿고 있다고 농담을 해왔다』고 말했다.
키가 크고 뼈대가 굵은 미남형의 비진스키 추기경에게 있어 조국 폴란드와 가톨릭 신앙은 불가분의 것이었다. 그와 같은 신비적인 결함은 그가 1946년 주교로 성성된「야스나 고라」(아름다운 산)성전에서「체스토쵸바」의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할 때 맺어졌따. 그는 흑인 마돈나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로 했다. 참으로 몇몇 자유주의적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것은 거의 열광적인 것이었다. 흑인 마돈나상은그의 주교반지와 문장에 삽입됐다 또 대형 마돈나상들은「바르샤바」와「그니에즈노」에 있는 자신의 저택 각 경당들에 걸어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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