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夏祥 바오로는 신앙 名家의 자손이었으며 그 출신이 부끄럽지 않게 천주사업에 헌신하고 주님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丁夏祥은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의 한 분이며 辛酉敎難 때의 순교자인 丁若鐘의 둘째 아들이었다. 동시에 18세기 朝鮮實學期의 대표적 학자인 丁若鏞의 친조카이다. 이처럼 신앙과 학문으로 대표되는 名家의 후예인 것이다. 丁若鐘은 西學의 연구로 도달한 신앙이요, 교회 창설이었기에 양반과 일부 中人등 지식계급을 중심으로 수용된 천주교를 서민층에 나누어 그리스도 구속의 은총을 함께 하고자 한문으로 된 교리서를 초등의 한문지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한글만을 읽을 수 있는 層을 위하여 한글로 된 교리해설서인「主敎要旨」를 저술하여 천주의 복음 전파에 위대한 공헌을 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그는 대표적 신자였기에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그의 큰아들 哲祥과 더불어 참수되어 천주대전에 血祭를 지내 순교하였다. 부친과 형님이 체포되었을때 일곱살의 夏祥과 그의 누님 情惠 그리고 모친 柳召史 등 일가도 모두 투옥되었으나 세 식구만은 석방되었다.
이 신유교란에 夏祥은 부친만이 아니라 큰아버지 丁若銓은 黑山島로, 작은 아버지 丁약용은 康津땅으로 귀양갔으며 가산은 몰수되어 서울에 의지할 곳 조차 없어졌다. 부득이 세 식구는 고향 馬峴(경기도 양주군 와구면 능내리 마재)의 큰댁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교우가 아니었던 큰댁의 차가운 눈초리와 박대의 나날을 이겨내야 했다. 그러나 역경속에서도 배양속에 그의 신앙은 자라면서 굳어만 갔다.
시골에서 일신의 안전만을 기할 수 없다고 결심한 夏祥은 모친의 격려를 받고 단신 서울로 상경하여 어느 교우댁에 의탁하였다.
당당한 학자 양반 가문에 생을 받았으나 정식으로 교리와 학문을 익힐 수 없었던 夏祥은 그를 깨우쳐줄 수 있는 학자 교우를 열심히 물색하였다. 마침내 멀리 함경도 무산땅에 귀양가 있는 조동진을 찾아갔다. 천리의 험로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 온 소년 하상을 맞은 노학자교인 조동진은 정성을 다하여 敎理와 한학을 가르쳤다. 본디 학자가문 출신의 재사인 하사의 학업은 날로 자라 단시일에 학문은 무르익었다. 신앙의 학문적 무장을 갖춘 하상은 서울로 돌아와 천주사업에 헌신하기를 맹세하고 교회에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세계적 규모로 성직자 영입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丁夏祥은「북경」주교에게 조선교회에 성직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나아가 멀리 천주교의 최고 수위권자인 로마교황에게도 청원서를 송부하게 되었다. 21세의 청년 丁하상은 이중대한 청원서를 그자신이「북경」주교에 전달하기 위한 중책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는 부경사행의 가장 비천하고 어려운 노역을 담당하는 노복의 자리에 끼어들었다. 일이 고될 뿐만 아니라 신분이 탄로되면 즉시 처형될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 어려운 일을 丁하상은 1816년 이후 아홉차례나 수행하였다. 해마다 나타나 간절히 원하는 하상의 끈기와 열정에 감탄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북경교회의 사정도 여의치 못하여 한사람의 성직자 조차 보내줄 수 없는 주교의 사정도 딱했다. 주교는 마침내 가족을 돌보며 기다리라고 간절히 타일렀을 정도였다.
그는 1823년 이후부터는 유진길을 협력자로 조신철을 밀사로 삼고 꾸준하게 영입운동을 게속하였다.
이러한 진실과 끈기가 있었고, 세계적 경륜이 있어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보았던 것이다. 조선교구 설정의 계기는 정하상ㆍ유진길 등 우리 선대교인들에 의하여 조성되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조선교구 설정의회 소식을 듣고 감읍하였으며, 1834년 의주에가 조선교구에 파송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영입하였고 1835년말에는 모방 신부를 맞이해 들였다. 또한 1836년말에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유 신부와 그편에 멀리 마카오로 조선교회를 짊어질 신학생(김대건ㆍ최양업ㆍ최방제)등을 국경선까지 환송하였고 다음해에는 샤스땅 신부를, 그다음 해에는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를 맞이해 들여 마침내 조선 천주교회로 하여금 교구장주교, 교구신부 그리고 교구신자 들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 교회법상의 교정체제를 갖춘 교회로 발전시켜 놓았다.
이점에서 丁夏祥 바오로의 朝鮮敎區 창설사에 발휘한 위훈과 봉사를 잊을 수 없다.
앵베르주교 입국 후, 그는 충직한 한국교회의 平信徒협력자로 진력하였다. 그의 信心은결코 자신의 救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구령에 있었다. 그의 믿음은 그리스도 형제애의 극치로서의 신앙이었다. 헌신적인 조선교인들의 활동을 눈여겨본 앵베르 주교는 한국교회는 한국인 성직자에 의하여 영도되어야 한다는 믿음하에서 베트남의 베리 주교의 예를 따라 박해하의 조선교회서도 속성 신학교육에 의해 성직자를 키우자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아직 독신이었고 이미 修德이 입증된 丁夏祥을 비롯하여 네명의 신학생을 간택하여 직접 그들에게 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미래의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한 이 원대한 설계는 1839년의 기해교란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땅 신부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고 丁夏祥 자신도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귀한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한국인으로서의 首先鐸德의 출현은 이보다 6년후 金大建이「上海」에서 서품받게 되기까지 지연되었다.
丁夏祥의 천주사업을 더욱 빛내주는 일이「上宰相書」이다 「재상에게 올리는 글」인 상재상서는 3천4백여자로 된 짤막한 글이며 그것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護敎論書이다. 그의 신앙과 학식이 담겨져있는 이 글은 박해자에게 천주교가 참된 종교임을 알려주기 위해 주의 존재, 교회의 유일성, 열혼의 불멸, 사후의 심판과 통화, 통색의 해명 등을 간결하게 엮은 호교론서이다. 상재상서는 그가 체포에 앞서 미리 준비하였고 체포 다음날 박해 당국자에 제시하였다.
당당한 文章으로 적절한 사례를 이용하고 고전을 인용해 가며 謹嚴하게 때로는 명쾌하게 천주교의 기본입장을 밝히고 있다. 뭣날 이 議敎論을 본 香港의 高若望主敎가 천주교의 기본도리를 간결하게 엮은 것으로 가장 우수하다고 극찬하고 1887년 간행하여 중국교인들의 敎理敎本으로 나누어 주었다 하니 그의 혼과 열이 담긴 上宰相書는 해외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다.
1801년 辛酉敎離후 목자잃은 교회 33년간의 긴 세월 문턱이 닳을세라 하고 금단의 국경선을 넘나들면서 편 웅장한 성직자 영입운동은 조선교구 설정의 계기를 조성하였고, 장차 조선교회의 성직자 되기에 속성신학교육의 신학생으로 교육 받았었고, 上宰相書를 올려 박해 당국자를 깨우쳐 주고자 했던 丁바오로 夏祥은 1839년(憲宗5) 9월 22일 서소문밖에서 45세로 순교하였다. 그보다 두달 늦게 79세의 모친 柳召史가 옥사하였고, 다음 달에 누이 엘리사벳 정혜마저 순교하였다.
예지와 불굴의 신앙과 실천을 궁행한 정하상 일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위훈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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