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후인 1948년 11월 12일 그는 전통적으로「폴란드의 수좌」로 이어져오는「바르샤바」와「그니에즈노」대교구장에 임명됐다.
그후 그는 전후 교회재건에 전력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전쟁동안 수많은 사제들이 살해 당한데 따른 성직자 부족과 소련군이 폴란드에 강요한 공산정권의 탄압활동 등으로 벽에 부딛히기 일쑤였다.
교황 삐오 12세는 1953년 비진스키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모를 받기위해「로마」에 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산정부 당국이 자신의 폴란드 귀국을 허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1953년 9월 비진스키 추기경은 12년형을 선고받은「키엘체」의 체스로우 칵즈마레 주교를 처벌하길 거부했다. 이로 인해 추기경은 1950년의 교회와 국가간의 협정을 침해한 죄로 체포돼 투옥됐다.
그후 3년간 그는 광활한 폴란드 내 4개 수도원을 수차 옮겨 다니며 구금당했다. 그의 소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56년 6월「포즈난」에서 학생 및 노동자폭동이 일어났으며 삽시간에 폴란드 전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이어 10월에는 궁정의 유력자들이 무혈혁명으로 강경노선의 스탈린주의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그러자「티토주의 이탈자」란 이유로 수년간 투옥생활을 했던 불라디술라우 고물카가 새로운 공산당 지도자로 또한 폴란드의 통치자로 등장했다.
그래도 혁명은 진행중이어서 당시 국력의 손실과 소련의 개입 등을 두려워한 고물카와 다른 폴란드 공산당지도자들은 비진스키 추기경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들은 폴란드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그에게 자유를 베풀었다.
자신이 국가에 협력하는 대가로 교회가 새로운 자유의 보장을 필요로 하는 동안 비진스키 추기경은 폴란드 기톨릭 신자들이 절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석방된후 곧 행한 한 강론에서『최근 교회에 가해진 모든 잘못을 저와 교회는 용서합니다』고 밝혔다.
1957년 10월「바르샤바」에서 발생한 새로운 학생폭동 동안 비진스키 추기경은 학생들이 시위행동을 전개할 것을 축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저는 발표와 사고의 자유를 외치는 여러분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의 조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고 역설하면서 학생들이 사려깊게 처신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1960년 1월 추기경은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고물카와 만났다.
이에 따라 폴란드 주교들과 공산주의 정권을 대표하는 합동위원회가 수차의 정ㆍ교문제회합을 개최했다.
1960년 3월 추기경은 폴란드 주교들이『가능한 범위내에서』교회와 국가관계 개선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양자간 항구한 관계 개선이란 불가능하게 보였으며 따라서 1960년대초에 비진스키 추기경과 고물카는 공개적으로 날카롭게 상호공격을 계속했다.
더욱 이 비진스키 추기경이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이었던 제 2차 바티깐 공의회는 교회에 대한 적대행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회였다. 당시 폴란드 전체약 70명의 주교들 중 약 25명만이 공의회 첫회기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았으며 또 이들은 미화 약 5달러에 해당되는금액만 지참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교황 요한 23세와 다른 나라주교들은 이들 폴란드 주교들에게 재정지원을 베풀었다. 그러나 비진스키 추기경은 1962년 12월 이 같은 상황에 이의를 제기했다.
폴란드 문교성의 한관리는 당시 비진스키 추기경이「로마」여행때 정부의 돈을 사용해 놓고도 그 용도를 밝히기를 거부했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비진스키 추기경은 그 비판이 거짓된 것이라고 말했었다. 비진스키 추기경은『나는 이 행위가 폴란드와 교황청간 장차 있게 될지도 모르는 협정체결의 가능성을 방해하지 않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편 비진스키 추기경은 교황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그리고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 등 4명의 교황을 차례로 선출했던 3명의 생존 추기경들 중 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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