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와 불굴의 신앙, 헌신과 순명의 실천으로 마침내 조선 교구의 설정을 이루게 한 바오로 丁夏祥에게는 그와 더불어 그 일을 달성하는데 잊을 수 없는 동지요, 信友가 있었으니 그가 곧 아우구스띠누스 劉進吉이다. 1816년부터 목자 잃은 양떼의 교회에 목자로 모셔 들이고 나아가 조선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항구적 대책을 마련하여야 겠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赴燕使行에 잠임하여「북경」주교를 찾아가기를 제 집 드나들 듯이 하는 정하상의 믿음직스럽운 협력자로 나타난 이가 유진길이었다. 1823년 이후부터 때로는 정하상과 더불어, 때로는 따로이「북경」교회를 드나들며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堂上譯官이었기에 공적으로 淸國使行에종사하는 인물이기에「북경」교회 당국자와 깊은 대화를 직접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하상이 선도한 조선교구 설정을 이끌게한 적극 대책은 유진길이라는 국제적 혜안을 지닌 중국어 달통자의 협력을 얻게 되었고 유진길이가 그 사업을 이끌고 나가는 새로운 견인차의 구실을 수행케됨으로써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양반 학자 가문의 후예인 정하상과 달리 유진길은 중인역관(中人譯官)가문의 출신이었다. 대대로 역관으로 벼슬해 온 조상의 덕으로 蔭補(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자리에 임명되는 일)로 사역원(司譯院)의 역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학식과 인물이 인정되어 마침내 당상역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부연 사대사행에 수행하는 역관들의 대표란 중책을 지니고 거의 해마다「북경」에 사행하는 직분을 맡았던다. 비록 양반보다 하위의 신분층인 중인출신이었으나 그의 학문과 경륜은 결코 양반 교양인에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유학에 힘써 역관이 되었으나 한때 불교에도 호기심을 가졌었다. 그가 천주신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유달리 강했던 學究欲에 의한 것이었다. 10살의 어린 나이때에 신유교란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순교하는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직 어렸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으나 장성함에 따라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고 죽은 순교자에 대해 차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차 우연히 집의 장농을 바른 종이가 천주실의(天主實義)임을 알고 그것을 떼어 이를 읽어보고 서학(西學)에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1823년경 유식한 양반교인 들로부터 漢譯서학서를 입수하여 이를 연구하게 되었다. 정하상이 이사실을 알게되어 그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그에게 영신의 깨우침을 심어주게 되었다.
유진길이 역관이라는 특수한 신분이고 의지가굳은 인품과 교양을지닌 인물이기에 천주사업에 귀한 일꾼을 안배해 주신 것으로 여긴 정하상은 1824년에 그와같이「북경」에 들어가 남당(南堂)에서 유진길을 아우구스띠누스라는 본명으로 영세 받을 수 있게 인도하였다.)
유진길은 정하상이 기대하는바 이상으로 조선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진력하였다. 실로 귀한 동지를 얻었던 것이다. 정하상과 유진길의 콤비는 이제 새로이 조선교회 평신도 지도자로 손을 잡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회의조직을 가다듬는 한편 교세를 펴기에 진력하였고「북경」교회에 대한 성직자 영임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그들은「북경」교회와 자주 연락을 취하기위한 교회의 密使로 헌신할 적임자를 물색한 끝에 부연사행의 馬夫꾼인 趙信喆을 입교시켰다.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의 트리오는 신분이 다르고 또한 사회적 지위는 달랐으나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교우로 동지적이고 형제적인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 生死를 같이하였다.
정하상은 전후 아홉차례, 유진길은 10여차례 조신철은 15ㆍ16차나 國禁의 국경선을 넘어「북경」을 내왕하며 성직자 파견을 청원하였고 조선교회에 대한 항구적 대책을 건의하였다. 또한 마침내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를 영입하였고, 앵베르주교를 맞아들여 조선교구의 敎政體制를 확립하였다.
1825년 유진길은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교회의 수위권자에 요청하기 위하여 교황에게 올리는 청원서를 정하상과 의논하여 작성했다. 이미 적은바와 같이 이청원서는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의 감동을 자아내 마침내 조선교구의 설정을 가져온 기억할 만한 문헌이었다.
유진길은 뒷날 성직자가 조선에 파견될 것을 확신하고「북경」주교에게 거듭 조선왕국 潛入의 구체적 방법을 적어「북경」으로보냈다. 1830년 10월에 그방법을 12條目으로 나누어상세하게「북경주교」에게 통보한 서한을 볼때 치밀한 조심성과 계획성에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조선교구 설정 후, 1834년 초에 劉方濟신부를 영입하여 33년만에 다시금 성직자를 모시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정작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애르(蘇霖) 주교를 맞이해 들이지 못하는 정하상, 유진길 등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劉神父의 몰이해와 반대공작으로 그들의 뜻과는 달리 주교영입이 불가능함을 통보하여야 했던 이들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1834년 말 유진길은 마침내 주교를 다음해 연말에 영입하겠다고 결단하여 중국땅에서 당신의 임지 조선교구로 입국하기를 고대하던 주교에게 통보하였고 1835년 연초에 사행입연 하였을때「북경」주교관에 나타나 다시금 브뤼기애르 주교에 통보하였다.
한편 기필코 교구장 브뤼기애르 주교를 영입할 것임을 유진길 조신철 金프란치스꼬의 이름으로 맹서 하는 서한을 멀리「로마」교황에게 올렸다.
이처럼 鎭國朝鮮에 생을받은 東方小王國의 한 譯官이면서도 중국과「로마」를 의식하는 세계적 경륜을 펴 교구장 브뤼기애르 주교를 영입하기에 헌신하였으나 조선입국의 날을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브뤼기애르 주교는 1835년 10월 조선왕국에 가까운 만주땅에서 별세 하였으니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약속대로 이해 연말에 주교를 영입하고자 柵門으로 나갔던 정하상 등은 브뤼기애르 주교 대신 모방 신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방(Mo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조선교구의 사목권을 위임맡은 빠리외방전교회 소속 성직자로 최초로 조선교구에 부임했다.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애르 主敎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백주년에 조선교회의 간절한 소망으로 유해가 영입되어 오늘날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을 지하에서 나마 바라보고 계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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