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여름은 아무리해도 잊을 수 없는 여름이다. 시간적으로 계산한다면 석달이라는 짧은 기간이겠지만 이제 그 시간이 다지나가 버리고, 생의 한 순간이라는 과거를 놓고 반추해 볼 때 그것은 대단히 폭이 넓고도 진하게 그라프를 그릴 수 있는 한 단면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괴로왔다거나 힘겨웠다는 날들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혹은 하나의 사제로서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나에게 몰아닥친 나의 파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한바탕 휘몰아쳐서 그안에 내가 휩쓸리고, 그래서 깨끗하게 정화될 수 있거나 씻기는 그 자체를 통해서 내가 탄탄해질 수 있고 나의 크리스찬 적이고 사제적인 실존의 의미를 두고두고 음미해 돌이켜 볼 수 있을 하나의 연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 그 여름의 시작은 보병학교에서 맞이 하였다.
군종신부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여름이 시작될 무렵 훈련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따라서 힘든 훈련들이 계속 이어졌다.
뜨거운 여름태양 아래서 헉헉대면서 뛰기도 무척이나 하였고 활활 달아오르는 맨땅에 엎드려 기기도 무척 하였다.
뜨거운 대지를 안고 순간순간 하였던 화살묵상(?)은 틀림없이 귀한 결실을 안겨 주겠지.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면서 부딛혀야 하고 붙들어 안아야 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였으며 그것을 숙달시키는하나의 훈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훈련을 마치고 군종신부로 임관되어 강원도 산골로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성모승천 대축일이 가까워 오는 어느날이었다.
마침 내가 가게된 곳은 나보다 먼저 임대한 동창 신부가 있던 곳이라 그 덕분에 며칠동안을 같이 지내면서 그곳의 지리도 익히고 사람도 사귀는데 큰도움이 되었다.
장마비가 몸시 내린 어느날 우리는 어느 연대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처음으로 미사를 드리러가게 되었다.
길이 패이고, 돌들이 물에 씻겨 내려와 돌밭이 된 산길을 한참 달려 교회를 찾아갔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대여섯명의 신자가 모였고 그런대로 조촐하게 미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한여름의 어둠이 쏟아지는 소낙비와 함께 질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오다보니 꽤경사진 고갯길이 있었는데 그 중턱쯤에서 갑자기 차가 시원치 않더니 드디어는 시동이 꺼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한참을 밀고 당기고, 또다시 경사진 곳으로 밀고 끝고 하였는데도 차는 꼼짝도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온통 범벅이 되었고 두어시간 중노동을 한 탓으로 완전히 녹다운이 될 지경이었다. 『이것이 시작이로구나』암담해지는 마음속에서도 자신을 곧추세우려 했으나 만사가 귀찮고 맥이 빠져 땅 바닥에 주저 앉고싶은 마음이 앞서기만 했다.
비는 내리고, 사방은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예수가 골고타 언덕에서 느꼈던 적막함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비록 질은 다르지만)속으로 되뇌이면서 연신 차가 살아나 주기만을 바라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천만다행인지 계속해서 들인 정성때문인지 차가 살아나주었다.
그때의 안도감을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그때 퍼뜩 머리속을 스치는 것은 인간을 위협하는 어떠한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는 것이 크리스찬의 특권인 것을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의 사제직 수행에 있어서 예견되는 어려움의 시작이라고. 흙투성이 생쥐가 되어 간신히 집에 도착, 머리부터 내리부은 바가지물에서 한 여름 내내 내 몸안에 누적된 더위와 피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상쾌함을 맛 보았다.
또 여름이 중턱에 와 있지만 그 해와 같은 여름은 또 다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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