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초기 교부 시대의 영성
6) 사막의 성 안토니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수행자들은 거룩한 저자들과 확실히 그리스도를 따라가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 홀로 고요하게 지내는 것만이 자기 안에서 보이지 않는 세력을 발견하고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있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마음 속 깊은 속에 어떤 갈등들이 잇는지 모른다. 그가 느끼는 그 갈등들이란 그가 해결할 수도 없으며 만질 수 없는 것들이다. 고요함은 무서운 시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피상적인 안정성들을 폭로하게 하며 그 껍질을 깨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미지의 심연을 우리에게 열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전통을 확인하는 것처럼 고요함은 이 심연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열어 보인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세력이다. 이는 윌가 그 세력을 알지 못하는 한 필연적으로 노에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깨달음은 신앙의 빛을 받아 조명을 받지 않는 한 우리를 파괴시킬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악의 신비」를 무사히 우리에게 열어 보이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과거에 우리를 위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그것을 직면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옛날 수도생활에 의해 기술된 악마적 소행을 볼 때 악마적인 그 이야기들은 우리를 혼란시키거나 속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확실히 복음의 가장 심오한 진리들 중의 하나를 보여준다.
고요하게 지내던 안토니오의 첫 번째 시도는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시련은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 안에서 무한히 연장된 부분으로 맥을 이루며 매우 계몽적인 해석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토니오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악의 세력에 넘어간 인상을 받는 과정 중에 밤에 당한 시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디어내었다. 그러나 매우 순수한(오직 가식 없는) 신앙으로 견디어 냈다. 하지만 시련의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의 광명의 및이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불평하였다. 『주님,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왜 시련의 초기에 나타나셔서 저의 고통을 멈추지 않으셨습니까?』그러나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거기에 있었느니라. 나는 네가 싸우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우리는 일찍이 오리게네스가 아가서 주석서에서 보다 단순한 형태로 밝힌 주제를 여기서 다시 발견하는 것이 아닌가? 그 주석서에 의하면 건조함과 조명들의 변경들은 마치 그것이 시련과 영적 성장 안에 내재해 있는 강건함의 리금처럼 된다는 것이다.
(3) 세상으로 돌아옴
어떤 감정에도 동요없이 완전한 평정 유지
심오하게 신비스러운 20년간을 마음의 사막과 완전히 외딴 곳에서 보낸 안토니오는 악령과의 전쟁에 아주 친한 듯이 보였다. 그 때 그를 본받기를 열망한 친구들이 그의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는 그들을 허용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드러난 방식은 이러하였다.
안토니오는 성전의 비밀 안에 감추어진 신비에 이끌려 갔다가 하느님의 숨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나왔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러 그가 요새에서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두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몸이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지도 않았고 단식이나 악령들과의 싸움으로 인해 야위지도 않았으며 그가 칩거하기 이전에 그들이 알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으로 깨끗했다. 또한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쾌락으로 느슨해지지도 않았으며 기쁨이나 낙담으로 동요되지도 않았다. 그는 군중을 보았을 때 화를 내지도 동요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달려와 자신을 환영하는 것에도 우쭐해지지 않았다. 그는 이성의 인도를 받는 사람처럼 완전한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본성을 따르는 데도 흔들림이 없었다.
은수자가 고요한 생활에서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 이 기술은 많은 점에서 특이하다. 신비와 비법 전수에 관하 고대 유다교나 그리스도교 문학에 있어 온전히 자의적으로 암시된 거동은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하여 말해진 것에 관해서는 일말의 실수도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의 은둔을 마치 그가 세라피스의 신전에 무엇인가를 빚진 사람처럼 그 신전에서 은둔생황을 하던 사람들의 생활과 비유할 문제는 없다. 안토니오가 가장 심오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맛본 것을 수사학적 셩식을 빌어 전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는 이중적 특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완전한 은수자는 이제 온전히 이해되고 성령에 사로잡힌 자이다. 성령은 안토니오가 더 이상 고독한 생활에 매여있지 않게 하신다. 은수생활은 그에게 승리를 주었다. 이제 승리를 쟁취한 후 성령이 그를 사로잡자 그는 자발적으로 세상으로 돌아왔거나 아니면 그가 세상을 자기에게 재결합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인 완전한 수도자는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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