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자만적 노력에 의하여 창설 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이 신앙의 공동체를 키우기 위해 무수한 사람들의 피와 땀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우리의 교회는 선교사들, 그리고 순교자들과 증거지물의 열성을 섭취하며 성장해 왔다. 이들의 노력에 의하여 조선 교구가 설정될 수 있었으며 교회는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제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하여 교구가 설정된 때를 전후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려한다.
교구설정을 향하여
선교사의 도움이 없이 신도들의 자발적노력으로 교회가 창설 되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창설된 18세기 후반기는 세계교회사에 있어서 교회의 활동이 침체상을 띠우고 있었다. 불란서 혁명의 여파로 교회의 활동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 직후와 같은 宣敎熱도 둔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조선의 사회질서를 새롭게 하고 우리 겨레에게 참다운 믿음을 갖게하려는 신앙운동이 조선 후기 사회에서 움터나왔다. 이 신앙운동은 민중 종교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으며 들녁의 불길과도 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후기 사회에 일대 충격을 주며 등장한 천주교회는 조선왕조의 정부당국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정부에서 천주교를 탄압한 이유는 천주교가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신분제적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 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조선왕조의 지도 이념이었던 주자학적 가칙관에 천주교가 정면으로 도전했던 까닭이었다.
연속되는 박해의 왕중에서 신도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보람있는 행동을 서슴치 아니하였다.
박해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면 그들은 신앙을 증거하거나 산골로 흩어졌다. 산골에 숨어서 살아남은 신도들은 지도자를 잃은 교회의 재건운동에 투신하였고 자신의 마을을 생활한 교회로 변모시켜 나갔다. 이런한 그들에게 조선의 교회를 관장하던「北京」교구와「北京」의 주교는 큰 힘이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北京」의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송을 끊임없이 간청하였다. 그들의 간청은 「로마」교황청에까지 보내졌다. 그들은 스스로 주교를 모시고 독립된 교구를 갖기 원하였으며 고구의 설정을 교황청에 탄원하여 마지 않았다.
조선교구의 설정
스스로 교회를 창설했던 우리 선조들의 저력은 교구의 설정에 있어서도 드러나고 있다. 신앙의 선조들은 죽음으로 하느님을 증거해 왔고 땀과 눈물로 교구설정을 탄원하였다.
여기에 한 고귀한 선교사의 희생적 지원이 있어 조선교구는 설정되었다. 그 선교사의 이름은 브뤼기애르. 그는 짜리의 방전교회 소속이었다.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이 되어 신도들을 도우기 위해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병마에 휩쓸려 조선을 눈앞에 두고 아쉬움을 지닌채 죽어갔다.
그의 뒤를 이어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왔고, 그의 모범을 따라 그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아끼지 아니하였다. 교구가 설정되고 교사를 맞이한 조선교회는 자신의 신앙공동체를 크게 키워나갔다. 교회의 반전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교회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가중시켜 나갔으며 1839년에는 기해박해가 일어나 무고한 신도들에게 죽음을 강요하였다.
박해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었으나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나갔다.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의 서품과 활동은 성장하는 교회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겨레를 위해 참 믿음을 선포해 주었다.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최양업 신부는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아니하였어도 그의 생활은 여속되는 순교 그 자체였다.
성직자와 신도들의 노력에 의해 교회의 기반은 다져지고 있었다. 그러나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회는 또다시 시련에 놓이게 되었다 병인박해는 향후 10여 년간 계속되었고 우리 교회가 겪었던 시련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이었다.
역사의 장은 바뀌어 조선왕조에서는 완강히 고집하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개화에로의 정책전환은 교회의 앞길에 희망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개화가 곧 신앙의 자유를 뜻하지는 아니하였다. 조선의 문호가 세계에 개방된 이후에도 한동안 신앙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188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되었다. 이 신앙의 자유는 1만여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들과 그밖의 무수한 증거자들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다. 우리의 순교자는 인간의 기본권인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전선에서 산화한 전사자이기도 하였다. 신앙의 자유는 우리에게 겨레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더 넓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여기에 신앙의 자유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뜻이 있을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기 이전 우리 교회는 평등한 사회의 형성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리고 어린이와 여성의 인격을 인정하고 그들의 권리신장에 도움을 주었다. 새로운 법과 정치의 구조를 제시해 주었으며 보편적 문화의 형성을 위해서 기여한 바가 컸었다. 또한 우리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하여 진리를 증거하며 이웃에 대한 사람을 실천하려는 행동에의 용기를 불어놓어 주어왔다.
이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우리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지 않더라도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 창설이후 계속되어 오던 민족사의 발전을 위한 기여의 쪽은 더욱 넓어졌다. 민족사와 교회사가 서로 만나는 장소는 보다 확대되었고 교회는 한국 문화의 일부를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신앙의 자유는 교회의 토착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구가할 수 만은 없었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지만 겨레는 침략의 위협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이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國權을 수호하여 민족의 국가를 갖는다는 또다른 권리의 확보를 위해 태웠다 이는 마치 그들이 선조들이 신앙의 자유라는 기본적 인권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행위의 연장과도 같았다.
국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서는 민중계몽 운동을 펴나갔다. 누구보다도 먼저 학교를 세워 젊은이를 가르쳤으며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과 근로자를 위한 야학도 설립하였다. 실업교육과 고등교육을 위해서도 노력했었다. 「아는것이 힘」인 겨레에게 힘인 앎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회는 언론기관을 세워 바른 개화와 거짓 개화를 깨우쳐 주었다.
한편 金尙台와 같은 신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徐想敦은 침략에 맞서 국채 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安重根은 침략의 주모자를 응징하고 십자성호를 귿고나서 「대한만세」를 불렀다. 나라를 지키려면 이들의 노력은 이제 우리교회의 자랑이 되었다.
이들과 온겨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의 노예가 되어 신고를 겪게 되었다. 노예인 겨레가 믿는 우리 교회도 노예인 겨레를 거느린 조선교구도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노예의 교회는 노예의 아픔에 동참하여야 하였다.
그것만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과연 그러했는가? 나라를 잃은 겨레와 슬픔을 더 나누기 보다는 제한된 신앙의 자유에 안주하기를 원한 적은 없었는가?
그러나 우리 교회는 순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이다. 이 어두웠던 시기에도 우리 교회의 일각에서는 겨레를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겨레와 숨결을 같이 하여 나갔다 또한 조선교구는 그 이름을 서울교구로 바꾸었고 대구와 그 밖의 많은 지역에 교구가 독립할 수 있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일제의 억압이 끝나고 우리 겨레는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은 우리 겨레와 우리교회에게 분단의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 슬픔은 한국동란으로 더욱 깊어졌다.
지금도 침묵을 강요당한 우리의 형제들이 있다. 또한 국토의 분단은 인간 내부의 분단을 가져왔다. 이제 우리 교회는 모든 분단의 장벽을 무너뜨려 그리스도의 정의가 깃드는 사회,그리스도의 시랑과 평화가 이룩되는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도상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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