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오 5ㆍ4)
아마 당신은 예수께서 어느날 산상 설교에서 인간적 사고 방식을 뒤집어 놓으시며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 박해받는 자들. 온유한 자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가리켜 「진복자」라 하셨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분께서 당신에게 제외하시는 이 말씀은 슬퍼하는 자. 외로운 자. 우는 자 등 바로 행복하지 못한 자들이 진복자라는 심지어 모순을 입증해 보이시는 듯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물을 것입니다. 이 확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메시아는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예고했던 이사야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읍니다. 『슬퍼하는 모든 사람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이사야 61ㆍ1)
그분은 사실 고통받는 자에게 행운이 있으며 그가 진정행복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받는 자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그러므로 그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세상이 처해있는 고통의 상태가 그분을 통해 어떻게 기쁨의 생활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슬퍼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을 때 고통에 어떤 특정한 범주를 정하지 않으셨읍니다. 어른이나 어린이. 남자나여자. 어떤 인종이나 어느지역에 살거나. 또는 불운. 재앙, 질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물질적인 부 혹은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심 등을 잃어버리게 된 일 등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어떠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든 모든 이의 모든 고통을 다 생각해 주시며 실망. 말못할 번민 등도 그분은 생각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이들을 다 생각해 주시며 만일 당신이 이순간 고통을 받고 있다면 당신 역시 그분께서는 생각해 주십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미래형 동사를 사용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물론 그 당시 고통받는 이들. 고통을 잘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하느님 당신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요한 묵시록 21ㆍ4)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때 일어나게 될 이 모든 것은 고통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 속에 벌써 희망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미래의 보상을 약속하시면서 단순한 체념으로 불행해 하는 자를 데려가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해 주십니다.
그분의 왕국은 실상 반드시 최종적인 형태로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여기에 존재하고 있읍니다. 이는 가장 극심한 고통속에서 참아 받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겨낸 예수안에 현존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안에 크리스찬들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니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성삼위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진복자가 지금부터는 분명하게 실증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로부터 온 왕국에서는 위로가 당신의 매일의 경험이 될 수가 있읍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르니. 당신은 이 왕국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며 당신의 생활은 예수께서 요구하신 바대로 그들의 계명에 따라 기초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배하는 고통들은 그분께서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미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이를 우리가 「질」것을 원하시며. 거부하거나 질질 끄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이를 잘 얹을 것을. 아니 오히려 횃불처럼. 또는 깃발처럼 십자가를 쥘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에 하늘나라의 기적이 이루어지니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가볍게 해주시며 당신은 이를 짊어지고 눈물 가운데에서도 미소까지 지을 수 있게 됨을 느낄 것입니다.
마음 속에는 당신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분께로부터 오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종교란 고통에 반항하지 않도록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아편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으나 그분께서 이를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의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고통 중에서 이를 극복하며 알아볼 수 있게 그들을 도와주도록 우리를 밀어주는 새로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