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성사가 제사의 식사이다」라는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좀더 명백하게 하기위해서는 미사에서의 주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밝혀야만 한다.
교회 공동체가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지만 이 봉헌이 진실되고 효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동적인 현존을 절대로 필요로 하며. 이 현존만이 교회로 하여금 인류의구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든다.
사실 미사의 참여자들이자신들을 제물로 바친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면 실제적으로 위험이 따르게 된다. 우리는 성체성사의 최종근원과 효력이 마치 우리자신의 봉헌에 매여 있다고 쉽사리 상각하게 되고 만다. 그리고 예수가 최후만찬 때 행하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주신데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성사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교회의 봉헌도. 빵과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성사적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빵과 포도주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비로소 크리스찬 제사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그리스도의 현존으로만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빵과 포도주는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그리스도께서 현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인간은 많지만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인간만이 하느님아버지가 즐거워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우리 자신의 죽음이 주님의 죽음을 성사적으로 나타낼 때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분쟁과 분열. 우리자신의 불완전성. 우리의 죄와 실패 때문에 크리스찬 희망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좌절과 실망 속에 헤매이게 될 것이다.
미사 중에 주님이 현존하심은 성체 성사적 봉헌의 근본이 된다. 수난전날 저녁에 행하신 바를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우리 가운데서 재현하신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영을 주시고. 우리 생활을 당신 생활과 일치시켜 주시고(I꼬린11ㆍ23-25) 우리가 바치는 제사가 부활의 영광을 완전히 누릴 수 있을 때까지(I꼬린11ㆍ26)주님의 죽음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실 것이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회망의 성사가 될 것이다.
성체성사를 제사의 식사라고 알아듣게 되면 거기에 따르는 결과는 죽음까지 불사하는 우리자신의 완전한 봉헌과 萬人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완전한 개방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러한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의필요성과 주님이 베푸시는 성령의 선물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최후만찬은 하느님나라에서 먹게 될 제사의 식사이며(루까14ㆍ5) 예수는 이러한 잔치를 최후만찬 때 약속 하였고(루까 22ㆍ16~18) 또 이 식사는 세말에 완성될 때 까지 역사의 진행 속에서 계속 베풀어지게 된다. 우리는「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길 빌때(루까 11ㆍ22) 성체성사적 이 기도를 바친다. 우리는 매일의 양식을 주시도록 빌며(루까 11절3)죄의 용서를 빌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빈다(루까 11ㆍ4) 더구나 루까11장 4절의 유혹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잔(루까 22ㆍ39-46)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 역시 그의 수난에 참여하도록 불리움을 받았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과 맺었다.
그리고 루까복음사가에 의하면 이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창조의 영 즉 성령을 구하는 기도이다. (루까11ㆍ13) 사실 우리 안에서 미움을 제거하여 주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우리자신을 개혁할 수 있는 힘을 미사성제는 지니고 있다. 우리를 성화하여 크리스찬 적 생기를 갖고 생활하도록 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따라서 성체성사를 새롭게 또 진실되게 생활하기 위한 첩경론은 바로 기도라 하겠다. 물론 이 기도는 미사중에서만 바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가 이 기도의 가장 적합한 장소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성사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었을 때 비로소 그를 알아 보았다. (루까 24ㆍ30~31) 이것을 달리 표현해본다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의 빵 나누는 그 방법을 보고 그를 알아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만이 빵을 나누는 방법을 알고 계시고 또 빵을 올바르게 나누신다. 인간도 빵을 나누고 이웃을 도우지만 그 방법은 적당하지 못하여 이웃에게 이롭기는 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수가 허다하며. 수혜자들의 감정을 손상시켜 반발을 일으키게 한다. 주님만이 나누는 방법을 아신다. 그것을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배울 수 있다.
성체성사는 식사이다. 식사는 가정의 식탁에서 베풀어지는 것이 가장 정상적이다. 그런데 가정의 식탁에서는 누구에게는 더주고 누구에게는 덜주고 법이 없이 각자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려고 한다. 家長은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하기에 자신을 배고픔보다 자녀들의 필요를 더 생각하게 되며 각자의 필요를 더 염두에 두게 된다. 이러한 나눔은 평등의 원칙보다 사랑의 원칙을 준수하게 마련이다.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는 전 인류와 가족적 식사를 나눈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 않겠는가.
올바로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성체성사에서 또 한가지를 배워야 한다. 이 성사에서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다. 당신이 가지신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주셨다. 참된 나눔은 소유(所有)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존재(存在)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불균형과 불평 등으로 가득 찬 시대이다. 이러한 불균형과 불평등은 평화를 위협하고 있기에 반드시 해소해야 할 현대인이 당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이다. 그러나 어떠한 학문도 비록 그것이 정치학이든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간에 이불균형과 불평등을 해소할 힘이 없다는 것은 명백해졌다. 이제 남은 방법은 또 유일하게 희망을 걸수 있는 것은 크리스찬 정신이고 나아가서는 성체성사의 나눔을 실천해 나갈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심포지움 주제발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세운 것임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레시페 대주교 동 헬더까마라의 이야기를 소개 하고자 있다.
하루는 신자들이 찾아와서 『대주교님 큰일났읍니다. 도적이 성당에 들어와서 감실을 깨고 성작을 훔쳐 갔읍니다.
그런데 성체를 마루바닥에 마구 팽개 쳐 놓고 갔읍니다. 와서 거두어 주십시오』했답니다. 그래서 대주교님은 그 성당으로 찾아가서 성체를 거두어 주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의 성체에 대한 신심은 참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일입니다. 성체를 거룩하게 모셔야지요. 그런데 빵으로 된 이 그리스도의 몸이 짓밟혔다고 여러분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법석을 떨었읍니다만. 판자집에서 고생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 소외 중에 헤매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그리스도의 몸을 짓밟은 모독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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