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의 12제자에서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성직자에 대해서만 사용되어 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사를 집행하고 교회를 다스리는데 평생을 바치기로 한 그들의 직책만을 사도직이라고 이해하여 왔다. 물론 그때에도 평신자에게 전교할 사명과 교회를 다스리는데 협력할 사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평신자는 현세적 생활을 하면서 자기구원에 힘쓰고 덤으로 그런 사명을 지녔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와 그 후계자로부터 직접 임명된 사도와는 구별되기 때문에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이름을 붙여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오면서 성직사회와 현세사회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고 산업혁명과 더불어 현세생활의 양식이 점점 분화하고 복잡해 짐에 따라 그 구원을 위한 복음화에도 새로운 대응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反교회적인 사상의 만연과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물질적 욕망의 추구와 이익대립의 사회관계가 심화되고 세분화 됨에 따르는 알력과 갈등 및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경험한 불안과 공포와 불신의 사회풍조 속에서 그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고 사는 평신자들의 복음화 운동을 떠나서는 현세의 구원이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래의 사도직의 개념을 넓게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는「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67년 가을에 있었던 제3차 세계평신도 사도직 대회에서는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활성화를 위해 나라마다 매년 1회「평신도 사도직의 날」을 정하여 모든 신자들에게 그 중요성의 각성을 다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대림절이 시작되기 전 둘째 주일을「평신도의 날」로 정하고 敎會層에 의한 일년간의 평신도사도직 활동을 반성하고 일층 그 필요성을 환기하여 새해의 활동계획을 세우게 하고 있다. 그 평신도의 날이 바로 11월 15일 주일이다.
평신도 사도직은 크게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성직사도직을 도우는 일이고 다른하나는 평신자 각자가 생활하는 영역에서 그 현세적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거하는 생활을 통해 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기능이다. 이 후자의 기능은 성직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를 특히 평신도 사도직의 기능이라고 하고 있다. 오늘과 같이 다원화된 현세생활 속에서 이 현대를 구원하는길은 평신자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소명을 깊이 인식하고 저마다의 생활영역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의 평신자들에게는 우선 현대인과 현대사회를 구원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 현대인은 현대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현대문화 특히 현대사상 가운데서 반교회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어 그 그릇된 사상을 비판하고 복음화하는 것이 현대에 살고있는 신자 지성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고유소명의 하나이다. 여러가지 사상의 난립속에서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이나 생활의 의미와 지표를 잃은 방랑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일깨워주고 자기생활을 통하여 그 모범이 되어야하는 것은 우리 모든 평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현대사상은 그 뿌리를 근세초의 자유주의 사상에 박고 있다.
당시의 계몽사상인 자유주의사상은 인간이 봉주나 전제군주의 횡포나 신분계급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뿐아니라 神과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완전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자유의 성취는 점차적인 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실력대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인간에 대한 간섭은 이해관계에서 오는 대립이든 사랑에서 오는 배려이든 자유를 기속하는 것이라고 하여 폭군의 압제와 신의 사랑을 다같이 배척하고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피지배자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와 피지배가 일원화하는 원리를 찾아낸 것이 이른바 사회계약론이고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이 이론은 평등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인 정치원리로서는 타당할 수 있으며 평등할 수 없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전혀 타당성이 없는데도 그 구별을 지우려하지 아니했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평등원리 만으로는 족하지 못해 모든 가치개념을 상대화 시켜야했고 진리와 선의 가치의식을 관념의 산물이라고 하여 내어쫓고 경험으로 검증되지 아니하는것은 적어도 인간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여 배척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상대주의 사상과 경험론에 입각한 실증주의 사상이었다. 이 사상들은 절대와 관념을 추방하는데 공동작전을 편것이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도 없고 생태적으로 타고난 가치의식도 없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하나의 관습이나 풍속에 불과하며 그것 때문에 인간이 기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인간사회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회의 일반의사나 다수의 의견이나 현실이지 사변이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왔다. 물론 민주주의가 현대적 정치제도로서 가장 좋은 정치제도라는데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그 평가는 정치의 방법론으로서 우수하고 또 상대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확율이 높다는데 있을뿐 그것이 철학이나 특히 존재론이 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런 사상들이 이른바 현대문화를 일으킨 것들이다. 그 결과 많은 현대인들은 모든 권위에 도전하고 神의 간섭뿐 아니라 부모나 스승의 간섭마저 마다한다. 인간이 지닌 선천적인 모든 의식을 부정하고 진리나 정의보다 현실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세적 이익과 쾌락을 추구한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후세대의 허무의식이다. 기성문화에 대한 부정과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전통에 대한 도전이다. 아직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하지도 못한 채기성에 대한 무비판적인 반발을 일삼은 결과는 삶의 방향의식을 잃은채 폭력과 관능의 노예로 타락되어간다. 이와같은 현실은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늦게나마 일부에서 그 허무와 실망을 딛고 다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빛을 찾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아직 그런 그릇된 현대사조에 쉽게 휘말리지 아니하고 더욱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나라 백성들이다.
성부께서 2천년 전에 당신 성자를 이스라엘 땅에 내려 보내심과 같이 지금 우리 땅에 특별한 성신을 내려 보내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젖는다. 이런 때에 우리 평신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도직에 더욱 충실함으로써우리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