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체칠리아의 생애는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으나 옛 전설에 의하면 체칠리아는「로마」의 유서깊은 명문 귀족의 딸로 태어나 행복한 가정과 인연을 끊고 하느님께 몸을 바쳐 신앙과 동정을 지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찌기 발레리아노라는 귀족청년과 체칠리아를 결혼시킬 생각을 가졌었다.
성대한 결혼식날. 결혼축가가 채끝나기도 전에 체칠리아는 발레리아노에게 자기는 하느님에게 종신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에게는 천사의 특별한 보호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교도인 발레리아노는 그 천사가 어떤 것인가를 보고 싶어했으므로 체칠리아는 그를 울바노 교황에게 보내 교리를 연구케하고 마침내 영세를 받게 했다.
그후 발레리아노는 놀랍게도 체칠리아의 수호천사를 뚜렷이 목격하게 되어 한층더 그녀를 존경하여 그녀의 종신서원을 쾌히 동의하는 한편 그의 동생 띠불띠노까지도 신앙에로 인도했다. 가난한이에게 막대한 재산을 나누어 주는 한편 체칠리아를 도와 복음전파에 주력했던 발레리아노는 마침내 알마키오의 미움을 사게돼 사형을 당했다.
동시에 체칠리아도 체포돼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갖은 위협과 감언이설을 배격. 신앙을 위해 희생할 결의를 굳혔다.
마침내 체칠리아는 목욕탕에 가두어 죽이는 가혹한 형을 받았으나 24시간이 지난후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자 목을 베어죽이기로 결정됐다.
군인들이 칼로 체칠리아의 목을 세차례나 쳤으나. 목이 잘리지 않은채 3일간 살아있은 체칠리아는 그런 고통속에서도 오른쪽손가락 세개와 왼쪽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3위 1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를 위해 죽는다는 것을 표했다.
117년 체칠리아는 모든 재산을 교회에 봉헌하고 마지막 성체를 영한 후 숨을 거두었다.
그후 817년 빠스가리스 교황에 의해 체칠리아의 성해는「로마」성 체칠리아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599년 그녀의 묘를 열어보니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채 생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회 수호자인 동정순교자 성녀 체칠리아의 축일은 2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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