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6ㆍ25가 터지고 전쟁이 치열해지자 공산당은 선교사들을 강계에서 더 북쪽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병원으로 사용하던 만포 임시수용소로 이동된 후 다시 중국 국경을 넘기위해 만포를 떠나 죽음의 행진을 해야했다. 중국 국경에 다다랐을때 중국의 입국 거부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채 구경근처 망막한 평원-바람을 막아줄 건물하나 없는 언땅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며칠을 지새웠다. 다행히 강계수용소에서 입던 평상복이 아니라 죄수복인 솜바지 저고리로 갈아 입은 덕에 조금은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견딜 수 있었지만 얼은 수수주먹밥 하나로 연명해야하는 배고픔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참으로 주림과 추위로 절어진 죽음의 행진이었다. 이곳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몇몇 선교사들이 먼저 주의 품속에 안기기도 했다.
중국 입국이 끝내 거절당하자 11월 다시 만포 입시수용소로 이동됐으나 미군 폭격으로 수용소는 물론 만포시가지 전체가 불바다를 이뤘다. 이때 선교사들은 피신하기에 바빠 그나마 한권씩 간직하고 있던 기도서 등을 잃어버렸다.
몇시간을 폭설을 피해 산속을 헤매다가 어느 외양간을 찾아 양들을 우리 밖으로 내몰고 그곳에서 영하 20~30도의 상상도 못할 추위의 겨울밤을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이동 속에서도 한시도 끓이지 않는 따가운 감시의 눈길을 받으며 또다시 만포근처에 자리 잡은 선교사들은 서있을 수도 앉아 있기에도 불편한 높이의 천정으로 된 이층 간이집에서 며칠을 보내다가 삼각형꼴의 군대 내무반 비슷한 토막집 같은 곳에서 통행이 금지된채 남녀 선교사들이 다함께 한곳에서 숙식을 해야만했다.
바닥에는 볏짚을 깔고 겨우 한사람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내어 놓으면 두줄로 머리를 맞대고 자기에도 좁은 폭이었다. 그 토굴집 제일안쪽에 위치한 나무통으로 만든 화장실만이 이곳 생활의 유일한 이기 전부였다. 그리고 몇사람만이 이 주위의 군인들의 식사준비와 동료들 식사준비로 밖에 나올 수 있었을 뿐 모든 생활이 그 토막집 안에서 이뤄졌다.
여기서는 강계 옥사독과 달리 미사도 기도도 움막같은 곳에서 숨소리를 죽여가며 몰래 조용조용히 봉헌해야했다.
그때 성탄절에도 굴속과 같은 깜깜한 토막집 안에서 작고 초라한 구유였지만 몰래 마련했고 양쪽 침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성탄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다. 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고 자유를 되찾아 선교사업을 계속 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한편 『비록 외형적인 환영준비는 충분히 할 수 없었으나 우리들 마음에 아기예수께서 탄생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날 성탄절미사에 나도 참석하고 싶었지만 식사당번으로 밥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참석치못했다. 대신 나는 식사를 운반하는 신부님께 부탁드려 성체를 모셔다가 군인들 몰래 영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런 영성적인 기쁨이외에 이곳의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 바로 그것이었다. 식사로 나오는 입에 맞지않는 콩밥을 연일 먹다보니 매일 저녁이면 설사 행렬은 줄을 이었다. 너무나 어둡고 통로가 좁아 팔높이 정도로 통로를 연결하는 새끼줄을 쳐놓았다. 화장실에 갈 때와 돌아올 때에는 그 새끼줄을 잡고 한발한발 디디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돌아오게 돼있었다. 그러나 항상 설사행렬은 끊이지않아 너무나 급했던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옷을 입은 채 설사를 하기도 했고 어떤 선교사는 그 똥통을 비우다가 추운겨울날 언땅에 미끄러져 흠뻑 뒤집어 쓰는 등 웃지 못할 어려움을 수없이 겪기도했다.
또한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으려면 이미 옆사람들로 메워져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마음이 약한 이들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 울면서 지새우는가하면 옆사람과 다투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나보면 옆사람이 죽어있기도 했으나 출입이 금지돼 사랑하는 형제들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조차도 직접 하지 못하고 군인들에게 시체를 넘겨줘야하는 슬픔과 고초를 겪기도했다. 마침내 생지옥과 같았던 만포에서의 수용소생활을 끝내고 대형 트럭에 실려 강계 옥사독수용소로 되돌아왔다.
자신들이 만들었던 소성당과 거주하던 집들은 그대로였으나 먹을 양식이 동이나 있었다. 마침 밭에는 지난 가을에 거두지 못했던 감자와 무우가 언채 땅속에 묻어있었고 강냉이만이 낙엽된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다음해 성탄절에는 호박씨도 모아두었다가 가루를 내어 케익을 만들고 호박줄기를 말려서 케익을 장식하는가하면 얼은 감자가루로 떡을 만들었는데 그 가루가 새까맣게돼 떡을 만들고보니 꼭 마귀같이 보였다. 그래서 그 떡을 마귀새끼라고도 불렀는데 지금도 그때의 선교사들이 모이면 『마귀새끼의 맛이 그래도 좋았다』고 추억에 잠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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