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사독에서 다시 지내는 동안 우리를 감시하는 공산당 책임자는 아주 악질이었다. 모두가 그 꾀투성이 거짓말 명수인 그를 두려워했으며 우린 그를 가리켜「살살이」라고 불렀다. 그는 1끼에 옥수수가루 5g백~6백g밖에 배급하지 않았고 더구나 환자들에게는 3백g밖에 주지 않아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려야했다. 따라서 수사들은 밤중에 몰래나가서 땅속에 묻힌 언 감자와 광속에 재인 옥수수를 한자루씩 어깨에 메고 살금살금 들어왔다. 그 자루에는 돌멩이도 이따금 섞여있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지만 불안속에서도 그 훔친 것을 배급식량에 섞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오래갈리는 없었다. 몇몇 수사들이 현행범으로 체포돼 감옥에 던져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들의 말인즉 온민족이 전쟁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데 편하게 앉아 봄에 뿌릴 씨앗을 축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혹독한 겨울이 지나자 봄은 다시 찾아왔다. 연약한 싹들이 두꺼운 땅을 뚫고 뾰족이 머리를 내미는 신비스런 자연 앞에서 우리는 가슴이 터질듯 했으나 잠시후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그 뿌리들을 캐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특히「달래」는 양념이라곤 없던 그곳에서 훌륭한 양념이었다. 근근이 생명을 잇는 상황속에서 또 다른 참상은「살살이」의 회포로 많은 형제자매들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53년「살살이」는 딴 곳으로 전임됐고 딴 책임자가 왔다. 그는「살살이」보다는 매우 인간적이라 그가 있는 동안 죽는 이도 줄어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은 비록 약했지만 열심히 일을 했고 배추ㆍ호박ㆍ조ㆍ옥수수ㆍ고추 등을 심어 많은 수확을 거두었으며 염소ㆍ소ㆍ돼지ㆍ닭등도 길렀으나 육류는 군인들에게만 돌아갔지 우리는 계란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53년 가을 높은 사람(?)들의 연례 수용소방문은 우리에게는 믿기지 않은 사건이었다. 이들은 농사작황을 비롯, 생활환경 등을 살펴본 후 미안한 표정으로 『이이 전쟁이 끝났으니 흰쌀과 함께 새해부터는 새 옷도 주겠다』며 외국인으로서의 대접을 약속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거짓말만 들어왔기 때문에 이 말을 듣는 순간 전부 웃기만 했다. 그러나 나중에 곰곰 생각하니 적십자 등지에서 외국인 선교사 석방을 요구했고 또 압력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 높은 사람이 다녀간 며칠 후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될 움직임을 느꼈고 바로 소 등 가축이 이동됨과 동시에 한밤중에 집합되어 산에서 내려와 평양행 기차에 올라야했다. 함께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동료들을 두고 내려오는 그 찢긴 가슴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으랴만 그들의 안식을 빌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평양에 도착하니 우릴 태울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 군인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약30㎞를 가니 군인들이 철수하고 텅빈 캠프에 다다랐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행선지에 대한 불한으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획기적인 환경에 부딪쳐야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밥 먹듯이 들어온『개××』등의 욕설이 전혀 없고『전쟁이 끝났다』면서? 외국인에 대한 올바른 대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흙바닥에서 생활해온 우리에게 펼쳐진 것은 따뜻한 온돌방ㆍ5년동안 구경조차 한 일이 없는 흰호청의 이불ㆍ비록 군대식이었지만 서양요리사까지 있었으며 깨끗한 군복바지와 점퍼도 배급받았다. 전부가 어안이 벙벙했다. 또 재미있는 일은 옥사독에서 우릴 못살게굴던 간수 몇몇이 우리들의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의사와 간호원이 상주했으며 치과까지 있었고 우리는 양복재단사로부터 양복을 맞추고 구두까지 갖추게 되었다. 따뜻한 온돌방에는 외국잡지까지 마련돼있었고 가끔 느닷없이 밤중에 깨워져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잡지들은 동독 선전책자로 서독을 왜곡소개하고 있었고 영화 역시 이남과 이북을 거꾸로 선전하는 것이라 우리는 영화상영때는 눈을 감고 있기도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호황 (?) 속에서도 또 성탄은 다가왔다. 옥사독과는 달리 종교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고 군인들은 전례에 필요한 성탄나무ㆍ초 등을 구해다 주었으며 우리는 식당을 마음껏 장식, 이쁘게 꾸민 구유 앞에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불러 외운 성탄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수도원에서처럼 성탄자정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주님의 성체를 영하는 기쁨!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였으며 아침에는 공동기도를 함께 봉헌했다.
낮에는 산에 올라가 놀고 군인들이 요리해준 음식, 특히 지금껏 구경도 못한 빵을 먹을 수 있었으며 남자들은 담배까지 선물 받았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이러한 대접에 우리는 의아해했다. 그런데 옥사독에 같이 있다가 우리 시중을 들고 있는 한 간수의 제보로 마침내 우리는54년 1월 4일 독일로 보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은 본색을 드려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5년 수용소생활이 얼마전부터의 생활처럼 호화판이었다는 내용에 사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절대로 거짓말은 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도 우리가 응하지 않자 그들은 급기야 신문기자까지 동원, 김치 밥ㆍ고기 등을 잔뜩 차린 상 앞에 우릴 모아놓고 일방적인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우리는 그냥『김치가 맛있다』는 등의 대답만 했다.
이들은 우리의 태도에 펄쩍 뛰었다. 사인을 않으면 다른 방법이 또 있다고 위협했다. 우리는 모여 대책을 숙의, 거짓말까지 할 건 없지만 몇 달 동안 인간적 대우를 받았다는 등 평범하게 적어 사인을 해 그 다음날 보냈다. 다행히 그 일은 잘 무마된 모양이었다. 이러한 사인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1월 4일 떠날 예정인 것이 8일로 연기됐으나 하여간 우리는 그 곳을 떠나게됐다. 중국→러시아→폴란드→동독→독일 「프릴란드」 캠프에 도착하기까지 2주간 기차에서 지내는 고역을 치루었지만 각 나라마다 서독인 안내자가 바꾸어가며 탑승, 우리를 보호했다. 이틀간의 수속 후 본원에 돌아가 조금 쉰 후 부원장직을 맡았으나 58년 나는 다시 한국에 왔다. 나는 독일인이지만 수련 수녀로 한국에 와서 한국에서 허원을 한「메이드인 코리아」수녀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한국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시어 고통중에서도 나는 성숙했고, 또 한국에서 하느님의 축복으로 나는 비록 지금 늙었지만 젊은 수녀들이 크고 있어 나는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
정말 고통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신비이다. 끝으로 옥사독에서 함께 나눈 동료수녀들 18명中 하느님 품에 안긴 3명 수녀를 제외하고 디오메데스ㆍ까리따스ㆍ 에나타ㆍ읍타다ㆍ프리틸마ㆍ아사치아ㆍ임 마끌라따 수녀들이 함께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또 겔뚜르드 링크수녀를 포함한 독일의 6명 수녀와 영적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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