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구원받았네. 나는 이제 죽음도 두렵지 않아. 나에겐 크나큰 희망이 있어. 믿음을 통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심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네』간단한 말인듯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놓을 수 있는 말들이 아닌성싶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누구나 자신 있게 이와 비슷한 말들을 할 수 있어야한다.
만일 확신에 넘친 그 말이 상대방의 마음속깊이 가닿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찬은 구원ㆍ죽음ㆍ생명ㆍ평화ㆍ정의ㆍ진리ㆍ자유ㆍ희망ㆍ믿음ㆍ사랑과 같은 무게 있는 용어에 친숙해야하며 그러한 말들이 나의 것이 되고 항상 내놓을 수 있는 복음이 되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직 기쁜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읍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Ⅰ꼬1ㆍ9장16)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현세적 복을 얻으려고 성당에 나오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참된 복음의 뜻을 왜곡하고 있지 않을까 해서다.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됨을 깨닫고 있는지?
또는 인간답지 못한 조건에서 해방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올바르게 깨닫고 있는지? 기쁜 소식이 단순히 병이 나았다든가 시험에 합격했다든가 사업이 잘되고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하는 것이라면 쉽게 이해가 가겠지만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병을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면서, 동시에 죄의 사함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전도). 예수께서는 이일(전도사업)을 하러오셨다.(마르꼬1장38) 병의 치유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당신권능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병의 치유가 기쁜 소식임에는 틀림없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은 그 이상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당은 병원으로 고치고 사제는 의사가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바오로사도께서는 복음의 역설적인 면을 보여주고 계신다.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약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미치리라하니 복음전파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잘 말해준다. 한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과의 생활을, 고통을, 나약함을 나누는 것이요, 그로써 복음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또 다시 복음의 역설이 나온다. 스스로 자신을 줌으로써 얻고, 자신을 희생으로 바쳐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복음전파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직무이기에 보수도 없다. 오히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바로 보수라는 것이다. (Ⅰ꼬ㆍ9장18)
우리는 또한 복음이 전파된 곳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유혹도 받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근방 다음동네에도 가자. 거기에서도 전도해야한다.
나는 이일을 하러왔다』(마르꼬1장38)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서까지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는 자유로움을 필요로 한다. 「내 사람」을 만들고 「우리끼리」만 뭉쳐 안일과 인간적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마음도 금물이다.
복음전파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유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직무요, 예수께서는 그것을 음식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다. (요한4장34)
한국 사람들은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기에 따스한 손길, 미소, 친절한 행위 등이 복음전파에 필수적 도구가 된다. 그러기에 말씀이 옳아서라기 보다는 「그를 따라서」성당에 나오다보니 진리를 깨우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바로 복음덩어리임을 실감케 해준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사람들이요 「그 사람 보기 싫어 성당에 안나간다」는 사람들이니 우리 모두는 삶 자체로서 이미 복음의 증거자가 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애덕행위, 곧친절, 봉사, 병자방문, 불우이웃돕기 등의 실천은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훌륭한 도구가 될수있다. 또 그자체가 복음의 산 증거이기도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의 전달자는 자신과 그리스도의 자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 친구가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나는 옆으로 비켜 설 줄도 알아야겠다. 세례자 요한과 같이 『그 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장30)고 할 수 있어야겠다. 그분은 「별들의 수효를 세어두시고 저마다의 이름을 부르시는」분이시니까.(오늘 미사 층계송ㆍ시편146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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