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들지 않은 어린이에게는 여러 가지 명하고 금하는 규정이 많다. 「이것은 먹지 말라」「저것은 만지지 말라」「거기에는 가지 말라」「세수를 하라」「이빨을 닦아라」등등. 그것은 아직 제대로 분별력을 갖지 못한 어린이를 보호하고 돌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어른은 스스로 판단하여 분간한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어른은 아니다. 자기 일을 가릴 줄 모르고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없고 실천력도 없다면 그는 나이든 아이에 불과하다. 「나이든 아이」 그것은 비정상이요, 발육부진의 비극적인 상태다.
「규칙으로 지키는 침묵은 벙어리요, 깨달음으로 지키는 침묵은 웅변」이란 말이 있다. 수억의 초보자는 규칙을 깨뜨릴까 여념이 없고 죄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고도의 수덕자는 법과 규칙의 근본정신을 터득하여 법이나 규칙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갖는다.
헤브레아인들에게 있어서 병, 그중에서도 특히 나병은 죄의 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나병환자를 부정한자로 낙인 찍었다. 사제에 의해 나병으로 공인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수염과 입술을 가리고 사람이 접근하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소리쳐야 한다.
사람들은 그를 피해가고 심하면 돌을 던져 쫓기까지 한다. 나병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뿐 아니라 외도의 손상으로 인해 혐오감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공공연히 배척받았고 또 피부접촉으로 전염되므로 접촉을 엄격히 율법으로 금했고, 격리된 곳에서 살았다. 이것은 인간 사회생활에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이러한 율법은 물론 건강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법이긴 하지만 동시에 종교적 윤리성까지 결부되어 병자들을 괴롭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 나환자를 만지신 것은 그자체로 율법을 거스린 행위였다. 예수께서 법이나 규칙을 절대 소홀하게 다루지 않으셨음을 생각할 때 그분의 행위는 그 법의 근본정신을 철저히 터득하신 자유로운 행위였다. 법이나 규율이 인간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삼 깨우쳐 주신 위대한 사랑의 행위였다. 사랑을 금하는 법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복음적 숭고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적 모범으로 보여주신 행위였다.
사랑을 능가하는 법이나 규칙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법과 규칙의 이름으로 사랑을 저버리고 있는가? 또는 사랑의 이름으로 법과 규칙의 본정신을 더럽히고 있는가?
예수님은 「안식일의 主요」「모든 법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바로 사랑자체 이시기에. 예수님의 「법의 정신」 곧 「사랑」을 올바로 깨닫는다면 세상에는 법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은 법의 정신, 곧 사랑을 깨달은「覺者」이다. 그러니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아이이다. 복음에서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ㆍ10장15)하여 항상 나이든 무지한 아이가 되어 주책을 부리든가 분별없는 학동이 된다면 그것은 복음의 어린이 정신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정화된 순수성ㆍ오랜 노력으로 변화되고 형성된 겸허하고 온유한 새로운 인간, 가난한 마음, 그것이 바로 복음적 어린이 정신이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적 상태, 무지의 상태를 말함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고. (꼬ㆍ전13장11)
우리는 무지의 아이상태에서 점차 성장하여 분별력 있고 깊이 있는 어른이 되어간다. 오늘 미사층계송의 말씀처럼 『그 죄 사하여 지고 그 허물 씻어진 이, 주께서 탓을 아니 돌리시고 마음에 거짓이 없는 사람』(시편 31편 1~2), 곧 정화된 의인이야말로 복된 자이다. 정화된 순수성, 그것은 생떽쥐뻬리나 베르나노스가 말했듯이 『모든 것을 혼동시키고 모든 것을 뒤섞어버리는 어른들의 지적인식』이 아니라, 한눈에 속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지닌 순수성 곧 「복음적 어린이의 정신」인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